지금은 병원에서 여자 의사 선생님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럼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의사는 누구일까요.
바로 박에스더(김점동) 입니다.
오늘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의사인
박에스더에 대해 포스팅하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40대 중년아재입니다.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우리나라 여성 중에는 최초의 의사인 박에스더는
서재필 박사와 김익남의 뒤를 이어서
한국 출신 중 역대 3번째 병원 의사입니다.
박에스더 이름의 뒤에 '김점동'이라고
알려드린 것은 실제 이름은 김점동입니다.
배재학당을 설립한 미국인 선교사인
헨리 아펜젤러의 일을 돕고 있었던
그녀의 아버지인 김흥택과 연안 이 씨라
불렸던 어머니 사이에서 1877년 겨울에
셋째 딸로 태어났죠.
김점동은 서울 정동에서 딸만 넷인
가난한 집안의 딸이었죠.
'배재학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근대학교입니다.
지금의 이화여자고등학교 자리에
이화학당을 세우죠.
아버지가 배재학당 관련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인연이 되어서 10살 때
이화학당에 입학을 합니다.
그리고 12살 때 받은 세례명이 '에스더'입니다.
이때 이화학당에서는 외국인 여성 선교사들이
영어로 이화학당의 조선학생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김점동은 금방 영어에 익숙해지게 됩니다.
이화학당을 설립한 메리 스크랜튼 부인은 의료적인
선교활동과 조선여성들을 위한 병원을 세웁니다.
설립자의 아들도 의사였습니다.
사실 그때만 해도 여성은 병원에 마음대로
다닐 수도 없었던 그런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스캐랜튼 부인이
여성전용병원을 설립합니다.
그 병원이 한국 최초의 여성전문병원인
'보구녀관'이며
이화여자대학교 의료원의 전신이죠.
영어를 능숙하게 했던 김점동은 보구녀관에서
의사들과 조선여성들 사이에서 통역을 맡았습니다.
이때 김점동은 놀라운 것을 보게 되는데요.
일명 언청이라고 하는 환자를 외과수술을 통해서
감쪽같이 치료가 되는 것을 보고
의사의 꿈을 키웁니다.
이때 치료를 한 의사의 이름은 '로제타 홀' 이었죠.
그리고 치료받은 환자는 10대의 소녀였습니다.
로제타 홀은 김점동의 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주죠.
로제타 홀은 김점동을 격려하고 응원해 줬습니다.
당시에 병원과 의사가 부족한 조선에서 김점동이
의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던 것이죠.
그 후로 김점동은 진료소에 있는 모든 약의 이름을
모두 외우는 등 엄청난 노력을 합니다.
나중에는 로제타 홀의 외과수술도 옆에서 돕죠.
당시 평양에 의료봉사를 간 로제타 홀을 따라서
의료봉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로제타 홀에게는 윌리엄 홀이라는
남편이 있었는데,
남편이 어느 날 전염병중 하나인 티푸스에 걸려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래서 혼자 조선에 있기가 어려워진 로제타 홀은
미국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때 김동은 자신을 의사가 될 수 있도록
미국에 함께 데려가 달라는 부탁을 하죠.
김점동이 열일곱 살이 되던 1894년에 그녀는
의사인 로제타 홀과 선교사 협의의 도움으로
당시 남편이었던 '박유산'과 함께
미국으로 향합니다.
미국으로 가면서 남편의 성을 따라서
박 씨가 되고, 세례명인 에스더를 붙여서
그때부터 '박에스더'라는
이름으로 살게 됩니다.
참고로 박유신과 박에스더는
'한국 최초로 교회에서 서양식
결혼식을 한 부부'이기도 합니다.
미국으로 건너간 후 처음에는
남편 박유산과 함께
뉴욕의 리버티 공립학교에 입학을 하게 됩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로제타의 집이 그 부근에 있었기 때문이죠.
그녀는 미국생활에 시간이 지나면서 적응을 하고
병원에 취직까지 하면서 라틴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물리학과 수학까지 공부를 하게 됩니다.
1896년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에
입학을 하게 됩니다.
엄청난 노력으로 불과 4년 만에
의과대학을 졸업하죠.
이로써 한국 최초의 여성의사가 탄생을 합니다.
당시에는 미국에서 최초로 의사 자격증을
딴사람인 서재필과 일본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한
김익한에 이어 한국인으로서는
세 번째 의사가 탄생을 합니다.
박에스더는 남편의 헌신적인
뒷바라지가 있었습니다.
아내인 박에스더의 학비를 벌기 위해서
당시 농장과 막노동과 같은 물론
식당일까지 마다하지 않았죠.
하지만 아내가 의과대학을 졸업하기
불과 2달 전에
폐결핵으로 그만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박에스더는 남편의 장례식을 마치고 1900년에
조선에 귀국을 하게 됩니다.
한국인 최초의 여성 의사인 박에스더는 굉장히 큰
환영을 받았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귀국 후 영어로 통역일을 하던
보구여관의 책임의사로
의료활동을 하게 됩니다.
그녀가 원하던 일을 이루게 된 것이었죠.
그곳에서 일을 하다가 자신을
의사의 꿈을 꾸게 해 주고
의사가 될 수 있도록 도와준 로제타 홀이
자신의 남편이 죽은 평양에 병원을 세우는데요.
그 이름이 '기홀병원'인데 이후
이곳으로 옮기게 됩니다.
그녀는 기홀병원이 있었던 평양으로 옮긴 지
10개월 만에 3,000명이 넘는 환자를
진료할 정도로 눈코뜰새도 없이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그때 평양에 있었던 여성치료소인
'광혜여원'에서도 열심히 진료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무료진료도 적극적으로 했는데요.
황해도와 평안도등을 돌면서
도움이 필요한 환자에게
먼저 손을 뻗어 의료봉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로제타 홀은 남편을 기억하기 위해 만든
기홀병원에 맹아학교와 간호학교를
만들어서 학생들을 가르칩니다.
이로 인해서 당시 조선의 왕이었던 고종에게
은메달을 하사 받기도 하죠.
당시에 조선사람들은 여자 의사라는 이유로
신뢰하지 못하고 미신등으로 멀리하기도 했지만,
그녀의 진심 어린 진료와 치료가 되는 환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그녀를 존경하는 사람이 생기면서
'귀신이 재주를 피운다' 정도로
명의로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몸에서
병이 생기고 있는 것을
뒤늦게 발견을 하게 됩니다.
그녀의 남편이 사망한 이유인
바로 폐결핵이었습니다.
그녀는 한국으로 귀국해서 헌신적이고 진심 어린
진료를 한지 불과 10년이 지난 1910년에 서울에서
그녀의 둘째 언니 집에서 사망을 하게 됩니다.
그때 나이가 불과 35살이었습니다.
이후 로제타 홀의 아들인 '셔우드 홀'이
한국으로 와서 우리나라 최초의
결핵 요양원인 '해주구세요양원'을
세우게 됩니다.
그는 원장으로서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크리스마스 실'은 이때 결핵퇴치를 위해서
해주구세요양원의 이름으로 발행을 하죠.
이 크리스마스 실은 우리나라 최초의
크리스마스 실이 됩니다.
처음엔 도안이 거북선 이었다고 전해지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남대문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여성으로서 그 목소리조차 내기가 쉽지 않은 시절
남편의 헌신적 보살핌과 엄청난 스스로의 노력으로
한국인 최초의 여성 의사가 된 박에스더에 대해
사실 많은 사람들이 알지는 못하는 듯합니다.
당시 여러 사회적인 부분에서도 차별을 받던
여성들의 상황은 물론 병원마저 함부로 가지
못했던 여성들의 상황에서 미국까지 가서
의사가 되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귀국 후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위해서
스스로의 몸은 생각하지 못하면서까지
전국을 돌면서 수천 명에 이르는 사람들에게
때로는 무료진료활동까지 한 박에스더 의사를
좀 더 많은 사람들이 기억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끝-
'knowledge & new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곳에서 '똑타' (19) | 2023.02.15 |
---|---|
2023년 국가장학금 총정리 (16) | 2023.02.14 |
아인슈타인 박사-일화와 어록 (14) | 2023.02.12 |
만우절-유래와 재밌는 이야기 (8) | 2023.02.11 |
국내 최대 내륙습지-창녕 우포늪 (14) | 2023.02.1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