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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경주 최부잣집 시작되다

by 40대 아재 2024. 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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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한 

훌륭하고 많은 분들과 가문이 있습니다. 

그중 널리 알려진 '경주 최부잣집'은 상당히 

많이 알려진 가문으로 조선시대 400년을 이어온 

진정한 참부자의 모습을 보여준 가문인데요. 

오늘은 경주 최부잣집의 시작부터 자세하게 

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40대 중년아재입니다.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경주 최부잣집의 전경과 사랑채 모습

 

'경주의 최부잣집'하면 떠오르는 말이 있죠. 

'주변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라는 아주 유명하고 대단한 말이 있습니다. 

10리가 4km이니, 100리면 40km로 한국의 

수도이자 대표 도시인 서울의 크기를 보면, 

가로로는 약 40km, 세로로는 약 30km 정도의 

크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면, 당시의 

주변 100리라는 의미는 현재의 서울시보다 

좀 더 큰 면적에 있는 사람들이 굶어 죽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것과 같은 의미이기 때문에 

이 말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알 수가 있죠.

 

 

 

 

경주 최부잣집의 시작

 

 

임진왜란 의병장으로 시작하다.

 

 

조선 중기인 1568년 현재 천년고도 도시인 

경주시 현곡면에서 당시 종9품 참봉을 지낸

'최신보'와 평해 황씨로 알려진 어머니 사이에서 

4형제 중 셋째로 태어난 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바로 지금의 경주 최부잣집을

있게 한 인물인 '최진립'이였습니다.

시조는 신라시대의 대학자인 경주 최씨의

시조 '최치원'이였습니다.

실제로 한국에 사는 최 씨 중 40%가 넘는

최 씨로 가장 많은 최 씨를 차지하고 있는

본관이죠. 경주의 옛 이름이 월성이어서

'월성 최씨'라고도 부르기고 합니다. 

경주 최씨의 시조인 '고운 최치원'은

무려 12세에 당시 당나라에 유학을 가서

18세에 과거급제 후 당시 당나라

'황소의 난'을 일으킨 적장 황소에게 

'토황소격문'이라는 글을 써서 그 글을 읽은 

반란군의 수장인 황소가 말(의자)에서

굴러 떨어져 엄청난 글솜씨를 가진

신라의 대학자로 알려져 있죠.

 

글로 난을 일으킨 황소를 의자에서 떨어친 대문장가이자 학자인 최치원 선생과 황소

 

이런 시조를 둔 최진립은 그의 나이 25세인

1592년에 일본의 침략으로 시작된 전쟁이죠. 

'임진왜란'이 터지자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당시 막내 동생이었던 '최계종'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임진왜란에서 일본과 싸웁니다.

이때 종 6품 부장을 지내다가 임진왜란 2년 뒤인 

1594년에 무과에 급제를 해서 싸우게 됩니다. 

당시 그가 얼마나 용맹했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 

지금도 남아있는데요. 불과 100명의 결사대로 

지금의 울산에 침입한 일본군을 무찌르고, 

당시 조선 총지휘관이자 행주대첩의 전설로 

임진왜란 3대 승전을 이끈 '권율 장군'과 함께 

일본군을 무찌르는 큰 공을 세우게 되죠. 

전쟁이 끝나고 난 후 '이순신 장군'도 역임한 

수군통제사와 수군절도사를 지내게 됩니다. 

 

정무공 최진립 장군의 동상과 그의 묘

 

그렇게 높은 관직에서 청렴과 성실한 모습으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중 1636년에 발생한 

'병자호란'으로 다시 전쟁에 참전을 하는데요. 

그때 최진립의 나이는 무려 69세였습니다. 

이때 이런 최진립의 모습을 보고 그의 노비들이 

전쟁에 참전하는 것은 무리라고 말을 하면서 

안전한 곳에 피신해 있으라고 말을 했는데요. 

결국 그해 겨울 용인험천 전투에서 전사를 합니다. 

이런 주인인 최진립의 전사를 알게 된 노비들은 

자신들도 환갑이 넘은 나이임에도 주인이었던 

최진립의 모습에 감탄해 전쟁터에 나가서

장렬히 청나라 군사들과 맞서 싸우다

전사를 하게 됩니다.

주인과 노비 간에 얼마나 끈끈한 신뢰가

있었는지 알 수 있는 실제 기록입니다. 

그리고 최진립이 전사 후 시신을 찾았는데, 

실제로 그의 몸에는 엄청난 화살이 박혀있어서 

마치 고슴도치처럼 보였다고 전해지고 있죠. 

그는 훗날 '병조판서'에 추증이 되는데, 

이때 인조가 직접 사제문을 내렸다고 합니다.

 

69세의 나이로 나라를 지키다 화살을 맞아 전사한 최진립 장군을 묘사한 그림

 

주인인 최진립과 그의 노비들이 전쟁에서

전사하고, 당시에는 상상도 못 했던 일들이

후손들에 의해서 생기게 되는데요.

그건 바로 노비에 대한 제사를 최진립의

제사와 함께 지냈다는 것입니다. 

당시 양반이 어떻게 천한 신분인 노비의 제사를 

할 수 있느냐의 강한 반대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나, 

주인을 위해 목숨을 바친 노비들의 제사를

실제로 계속해서 지내고 있으며,

그 노비들을 위해서 그들을 기리는

비각까지 세웠다고 전해지고 있죠. 

이런 것을 보면 최 씨 집안이 사람을 대하는 것에 

엄청난 신분제도를 유지하고 있었던

조선시대에도 얼마나 진심이었고,

사람을 아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경주 최부잣집의 시작인 최진립이 사망하고 난 후 

그의 셋째 아들인 '최동량'부터 본격적으로

부를 축척하게 되는데요. 

그는 남다른 선견지명과 아버지인 최진립의 

명망 높은 집안으로써 인정을 받게 되면서, 

당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황무지 개량과, 

수로 등 황폐해진 전쟁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나라에서는 그것들을 적극 권장했는데요. 

당시 경주 일대의 토지들을 개간하고 수로 등을 

형산강을 이용해 이양법을 도입해서 농사등으로 

엄청난 부를 쌓기 시작을 합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가 노비들에게 대했던 것처럼 

일을 잘하는 노비들에게는 지금의 성과급과 같은 

추가적인 인센티브를 주어서 생산력을 높게 하고, 

소작료를 소작농에게 적게 받아서 소작농들과 

당시 힘들게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게 상당히 

많은 존경과 부를 쌓게 되는 선순환이 생기게 되죠.

 

약 400년간 경주 최부잣집의 창고로 쓰여던 창고모습

 

그리고 최진립의 손자이자 부를 쌓기 시작한 

최동량의 장남인 '최국선'은 지금도 이어져 오는 

경주 최부잣집의 명언을 남기게 됩니다. 

바로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이가 없도록 하라

라는 말로 자신의 곳간을 열어서 먹을 것이 없는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기 시작합니다. 

할아버지인 최진립의 높은 나라에 대한 충성으로 

높은 관직에 올라 좋은 가문을 만든 후에, 

아버지인 최동량의 뛰어난 선견지명으로 부를 

쌓기 시작했으며, 자신인 최국선은 그것들을 

어려운 사람에게 베푸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죠.

경주 최부잣집에는 또 다른 여러 명언들이 있는데,

하나씩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경주 최부잣집 가훈과 내용

 

 

경주 최부잣집 가훈 1.

흉년에 땅을 사지 마라

 

이건 흉년이 되면 힘든 가난한 농민들이 먹을 것이 

없어 땅을 팔아 연명을 해서 부자들은

이때를 노리고, 더욱 땅을 많이 차지하면서

부를 축척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경주 최 씨 가문의 가훈 중 하나죠.

어려운 사람이 어려운 시기에 자신의 재산인 

땅을 헐값에 내놓는 것을 안타까워 한 최부잣집이 

그 사람들을 위해 정한 가훈이었습니다. 

 

경주 최부잣집 가훈 2.

과거는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마라.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마라'

라는 말은 양반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진사는 조선시대 초시 합격자를 말하는데요. 

높은 관직에 올라있다가 하루아침에 당쟁으로 

가문이 '멸문지화'를 당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한 

최부잣집의 뛰어난 안목을 보여주는 가훈입니다.

 

경주 최부잣집 가훈 3.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당시의 소작료보다 적은 5할 이하로 소작료를 

받아서 주변의 소작인들이 최부자의 논이 

오히려 늘어나는 것을 바라기도 했다고 하는데요. 

너무 많은 것은 없는 것만 못하다는 생각으로, 

어려운 사람을 돕고자 하는 최부잣집의 가훈이죠.

 

경주 최부잣집 가훈 4.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이 말은 만일 1년 소작료를 3천 석 받았는데, 

1천 석 만 집에서 사용을 하고, 또 1천 석은

집에 오는 과객을 위해 사용을 하라는 의미였으며, 

나머지 1천 석은 어려운 사람을 위해 사용하라는 

진정한 부잣집의 마인드를 보여주는 가훈입니다.

 

경주 최부잣집 가훈 5.

최 씨 며느리는 3년간 무명옷 입어라.

 

 

최씨 가문에 시집을 온 며느리들의 근검절약을 

위해 만든 가훈인데요. 

부잣집에 시집을 왔다고 티를 내지 말고, 

근검절약을 몸소 실천하라는 의미에서

만들어진 가훈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당시 어려운 사람을 도왔던 모습을 동상화한 모습

 

 

경주 최부잣집 가훈 6.

사방 100리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아마도 경주 최부잣집의 가훈 중 가장 유명한 

말이 아닐까 싶은데요. 

경주 최부잣집의 시작인 최진립의 손자이자, 

부를 본격적으로 쌓았던 아버지 최동량의 아들인 

3대 최국선이 말한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가훈이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이 가훈들은 모두 어려운 사람에게 나눔을 실천하고, 

어려운 사람을 절대 홀대하지 말라는 뜻을 가졌죠.

진정한 부잣집의 큰 마음가짐이 아닐까 합니다. 

이후 최국선의 장님인 '최인기'가 더욱

부를 늘렸으나, 최인기의 손자 '최종겸'에는

굉장히 쇠퇴하였고, 그의 장증손자인 '최옥'때에는

거의 파산에 이릅니다.

하지만, 최국선의 둘째 아들이었던 '최의기'가 

형인 최인기보다 물려받은 재산이 적었음에도 

그의 장남인 '최승렬'과 그의 손자인 '최종률'을

거쳐 당시 재산이 만석에 이를 정도로 부를

축척해서 경주 최부잣집의 명백을

이어가게 됩니다. 

 

경주 최부잣집의 가계도와 가족관계

 

그리고 7대 '최언경'과 8대 '최기영' 시절에는 

지금의 경주시 교동에 이주를 하기 시작을 했는데요. 

그래서 현재 최 씨 고택이 경주 교동에 있는 이유죠.

그리고 우리에게 잘 알려진 '동학의 창시자'인 

'수운 최제우'선생이 경주 최 씨의 시작인

최진립의 7대 자손 중 한 명이기도 합니다.

 

경주 최부잣집 1대 최진립 장군의 7대손 중 한명인 동학 창시자 수운 최제우 선생

 

이후 9대 '최세린',10대 '최만희',11대'최현식'을

거쳐 12대 '최준'에 이르게 되는데요. 

최준 시기는 일제가 나라를 빼앗은 시기입니다. 

그래서 나라를 다시 찾고자 최준은

전재산을 털어서 '조선국권회복단'에

독립자금을 기부를 하죠. 

이로 인해 실제로 옥고를 치루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재산은 물론 돈을 빌려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나라를 위해 또 기부를 하죠. 

이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백범 김구'선생이 직접 

감사의 마음과 자금이 쓰인 장부를 보여주면서 

일제에게 빼앗긴 나라의 독립을 위해 도움을 준 

최준에게 진심 어린 감사의 뜻을 전하기도 하죠. 

그리고 임시정부의 김구 선생에게 한 푼도 

안 빼먹고 전달한 '안희제'선생에게도 훗날 

존경의 마음으로 그가 살던 의령 쪽으로 향해 

절을 했다는 일화는 굉장히 유명합니다.

이 무렵 최준의 동생 중 한 명이었던 '최완'도

임시정부에서 열심히 나라를 위해 일을 했는데, 

일제의 간사한 모략에 빠져 옥사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주 최부잣집의 독립운동은 

계속해서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활발히 합니다.

그리고 12대 최준을 마지막으로 경주 최부잣집 

가문의 마지막을 장식하게 되는데요. 

사실 그의 가문은 아직도 이어지고는 있습니다.

 

12대 마지막 최부잣집인 최준 선생과 최준의 돈을 받아 단 1원도 빠짐없이 전달한 안희제 독립투사와 임시정부의 김구 선생

 

일제의 패망으로 광복을 한 후 최준은 

나라의 미래가 교육에 있다는 뜻을 가지고, 

'영남대학교'의 전신인 '대구대학'을 세웁니다. 

그리고 5,16 이후에 사립학교 정비령으로 인해 

투자의 어려움이 있을 무렵, 당시 대통령의 

비서실장이었던 '이후락'의 권유로 대구대학을 

나라에게 넘기게 됩니다. 

그리고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데요. 

이때 유명한 최준의 어록이 있습니다. 

'재물은 분뇨와 같아 한 곳에 모아두면 악취가 

나서 견딜 수가 없다. 그러나 골고루 사방에 

흩으면 농작물의 거름이 되는 법이다. 

재물은 모으기만 하고 좋은 곳에 쓰지 않으면, 

똥통에 들어앉아 있는 것과 같다.'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전 재산을 희사하게 됩니다. 

이로써 12대에 걸쳐 약 400년 가까이 이어져

내려온 경주 최부잣집의 공식적인 모습은 

마침표를 찍게 됩니다. 

 

복원 전 경주 최씨 고택모습과 어려운 사람을 베풀던 그림

 

보통 옛날 부자를 칭했던 말 중 '만석꾼'은 

당시 쌀 한 가마니가 80kg 이었던 걸 감안한 후 

그것은 현재 쌀 가격으로 환산을 한다면, 

차이는 있겠습니다만, 약 3~40억 원이라는 

금액을 매년 벌어들이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시 말해 한 달에 3억 원 이상을 버는 사람으로 

일반적인 월급쟁이의 100배 이상을 번다는 것이죠. 

그런데 경주 최부잣집 가훈 중에는 만석정도만 

남긴 후 나머지는 사회에 환원해라 라는 말이 있듯 

만석은 쉽게 넘는 재산을 벌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그런 것을 감안하면, 경주 최부잣집의 수입은 

요즘으로 치면 대기업 총수와 같은 엄청난 금액을 

매달 벌어들였다고 이해를 할 수도 있겠습니다. 

 

12대 경주 최부잣집의 최준 선생 모습

 

지금보다 힘들고 어둡고, 어려운 시대에서도 

경주 최부잣집과 같은 남을 위해 실천하는 

진정한 노블레즈 오블리주를 볼 수 있는데요. 

그것은 단순히 남들을 불쌍하게 여기거나, 

동정에서 나오는 마음만으로는 절대로 

나올 수 없는 행동과 마음이죠. 

오히려 지금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시대에 

경주 최부잣집의 진정한 큰 어른과 같은

진심 어린 마음과 행동들은 약 400년 가까이 

이어져 내려온 시간보다 훨씬 더 오랜 기간 

우리들에게 큰 울림과 가르침을 알려줄 겁니다. 

진정한 부자란 오늘 소개해드린 경주 최 씨의 

노비마저도 아끼고 진심으로 대했던 그 모습이 

진정한 존경받을 부자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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