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는 세금면제와 군대면제가 되는 마을이
경기도 파주시에 있습니다.
이곳에 사는 주민들은 모두 세금과 군면제입니다.
도대체 어떤 마을인지 포스팅하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40대 중년아재입니다.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대성동 마을의 유래
대성동 마을은 임진강 지류인 사천면
평야지대에 있는 조산리에 속합니다.
조산리는 조산이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조산, 조산동으로 불렸는데요.
조산은 개성동 동면 백동리 마을의 하천모래가
쌓여 산을 만들었다는 의미입니다.
고려말 대홍수로 개울 모래가 내려와서
부락 앞 개울변 높은 산이 성같이 둘러싸여서
그 이름이 '대성동'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하천의 이름을 '대성천'이라 했는데,
이후 조선시대에 '사천'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대성동 마을의 지리적 특성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비무장지대에
위치한 대성동 마을은 정전협정에 따라서
1953년 8월 3일에 군사정전위원회가 이 마을을
평화의 마을과 함께 조성을 했습니다.
현재 46 가구 183명이 거주하는 대성동 마을은
유엔사의 민사규정과 대한민국의 법률이 공동으로
적용되는 아주 특수한 지역입니다.
행정구역은 파주시에 속하지만,
민사 행정과 구제 사업은 유엔군사령부의
직접적인 관리를 받습니다.
정전협정 시 남한과 북한에 각 1개씩 마을이
평화의 마을로 지정이 되어 만들어졌는데,
북한에 위치한 마을이 '기정동 마을'입니다.
그리고 남한은 바로 대성동 마을이죠.
북한의 기정동 마을도 대성동 마을처럼
북한에서 유일하게 비무장지대에 위치한
민간인 거주지역입니다.
현재 대성동 마을과 기정동 마을은 분단과
대치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은 운영하지 않지만, 마을의 서북쪽으로
개성공단이 직선으로 4km 거리에 위치합니다.
걸어가도 1시간이면 갈 수 있는 곳이죠.
그리고 북한의 기정동 마을을 육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유일한 마을이기도 합니다.
마치 서로를 볼 수 있는 유일한 마을로
분단이 낳은 쌍둥이 같은 존재의 마을이죠.
대성동 마을 주민의 혜택
대성동 마을의 주민은 몇 가지 자격과 혜택이
동시에 주어집니다.
우선 마을 주민은 납세의 의무가 없습니다.
그리고 남자는 국방의 의무인 병역면제가
자동으로 주어집니다.
그 이유는 국제연합군사령부에서 직접적으로
관할을 하는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민사행정 및 구제사업은 국제연합군인
UN 총사령관이 책임지고 있죠.
보통은 한미연합군사령관이 겸직을 합니다.
대성동 마을 주민의 엄격한 제한사항
그러면 남자는 군대에 안 가고,
주민들은 세금이 없으니 마냥 좋을 것 같지만,
사실 그들에게는 혜택과 동시에 제약되는 것들이
있는데요. 꽤 엄격하고 지금도 지켜지고 있죠.
첫 번째 주거와 거주, 이전의 자유가 제한됩니다.
정전 협정 당시에 거주했던 원주민들과
그들의 자손만이 거주가 가능합니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설령 그들의 자손이더라도 1년 중에 8개월을
대성동에서 거주하지 않으면 주민권이 박탈되죠.
두 번째 평시에도 전시 통제를 받는 마을입니다.
날이 어두워지면 통행금지가 있습니다.
그 시간 이후에는 맘대로 돌아다닐 수도 없는 거죠.
그리고 친인척이 방문을
하려고 해도 그냥 못 갑니다.
통행증을 신청을 해서 패스가 되어야
대성동 마을에 들어갈 수가 있게 됩니다.
세 번째 외지로 결혼하면 주민권이 박탈됩니다.
대성동 마을의 남자가 외지의 여자와 결혼을 하고,
그 마을에 살게 된다면 주민으로 남게 됩니다.
하지만, 여성이 외지의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되면,
무조건 대성동 마을의 주민권이 박탈이 됩니다.
다만, 외지의 남자가 대성동 마을의 여자의 집으로
데릴사위로 오게 되면 주민권을 모두 줍니다.
하지만, 정전 이후 지금까지 딱 2명만 있었습니다.
스스로 대성동 마을을 떠난 사람이 다시 주민으로
복귀하려고 하는 경우에는 유엔군사령부의 허가를
받아서 복귀할 권리를 얻게 되는데,
이게 상당히 어렵고 까다롭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출입이 굉장히 어렵고 까다로워서
선거를 할 때는 주민 모두가 한 번에 나가서
선거를 한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유일의 투표율 100% 인 마을입니다.
대성동 마을의 주민이 나이가 32세가 되면,
대성동 마을에서 계속 살아갈지를 정하게 되죠.
자유의 마을이지만,
자유가 아닌 거 같은 느낌입니다.
대성동 마을을 입장하기 위한 서류 및 자격
대성동 마을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마을이기 때문에
소명자료를 통해서 출입허가 신청을 하여,
출입을 할 수가 있습니다.
허가가 어렵게 나더라도 아래와 같은 서류를
반드시 지참하고 방문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 보건의료 관련
의사 면허증 또는 간호사 면허증 지참
* 국가공무원
공무원증 지참(세무직 경찰직 제외)
* 교육학술 연구 관련
대학교 및 대학원 교원증 및 학술연구 증서 지참
* 영양사 및 졸리사
영양사 면허증 및 조리사 면허증, 자격증 지참
* 지방공무원
경기도 또는 파주시 한정 공무원증 지참
* 종교인
관련 증서 지참
* 사회복지사 및 자원봉사자
사회복지사 자격증 및 지역 행정상 임명장 지참
* 출입이 어려운 사유
단순 사진촬영을 위한 사진작가 방문요청 시
카메라 기종 및 촬영목적 유엔군사령부의
별도 허가를 받아야 출입이 가능
대성동 주민들의 생업과 생활 유의사항
주민의 대부분은 농업을 생업으로 하고 있습니다.
주로 벼와 고추를 재배하고 있습니다.
일부는 가축도 키우고 있는데요.
돼지와 사슴등을 키우고 있다고 합니다.
마을사람들의 연간소득은 생각보다 높은데요.
연간 약 7천만 원에 가까운 소득이 있다고 합니다.
땅과 위치는 경기도 파주시입니다.
다만 모든 게 유엔사령부의
지시와 통제를 받고 있죠.
아시다시피 UN은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토지소유를 하지 못하게 됩니다.
소유는 파주시가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죠.
UN이 통제를 하고 관리를 하지만 치외법권은
절대 아닌 지역입니다.
마을 주민이 UN군에게 행패를 부리면 4개월간
추방을 당하게 되는 규정이 있습니다.
이는 주민권을 가지게 되는 가장 큰 내용인
1년 중 8개월 이상 살아야 하는 규정을
어길 확률이 굉장히 큰 징계로 사실
주민권 박탈로 본다고 합니다.
마을의 이장은 주민들의 의지로 선출해서 뽑지만,
유엔군사령관의 직권으로 이장을 파면할 수 있죠.
생각보다는 꽤 생활여건이 만만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이곳 대성동 마을의 사람들에게는
투표에 참여할 수 있는 참정권이 정전협정 이후
약 14년간 제한이 되었다고 합니다.
1967년이 뒤어어서 투표권을 받게 됩니다.
대성동 마을에서 있었던 실제 사건사고
지리적으로나 마을이 생긴 여러 상황으로
대성동 마을에서는 사건사고가 발생을 하게 됩니다.
군사분계선이 너무 가까워서
정전협정이 맺어진 지 5년이 지난
1958년에 월북과 납북등의 일이 있었죠.
당시 마을 사람들과 미군사이에 통역관을 하던
'김영기'씨가 월북을 하게 되는 일도 생깁니다.
그리고 같은 해 겨울에는
'이대성'씨가 여러 명에게
끌려가서 살해당하는 사건도 생기게 되죠.
그리고 1960년대에는 마을 주민이 북한군에게
사살된 적도 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1975년에는 실제로 농부인 주민이
북한으로 납북된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대성동 마을에서 북한으로 납북당했다가,
북한에서 군인으로 살다가 탈북한 사람도 있습니다.
1997년에는 마을 주민인 한 할머니와 그의 아들이
도토리를 주우러 갔다가 북한으로 끌려가서 5일간
북한에 잡혔다가 풀려난 적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마을과 가까이에 있는 임진각에 대한
북한의 군사적 타격 위협으로
2012년에는 마을주민 모두가
벙커에 숨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대성동 마을의 교육시설과 편의설
이런 지리적 상황으로 대성동 마을에는 흔한
편의점이나 슈퍼마켓과 같은
구멍가게도 없습니다.
그러한 것들을 살 수 있는 유일한 곳은
마을공동으로 관리하는 직판장이 있습니다.
직판장은 우리가 아는 군대 PX 같은 의미입니다.
과자나 아이스크림 등 제한된 품목만 취급하죠.
그래서 마을사람들은 장을 보려면
자차를 이용해서 그나마 가장 가까운
문산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나마도 통일대교에서 검문등으로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이유로
맘먹고 장을 보러 가야 합니다.
음식점이나 식당도 물론 전혀 없습니다.
외식하려면 문산이나 파주, 일산들이 그나마
거리상 가깝기 때문에 외식은 굉장히 번거롭죠.
그리고 생활 편의시설 중 하나인
이발소나 미장원도 전혀
이 마을에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나마 요즘이야 교통과 도로발달과 자차등으로
이동에 대해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예전에는 이러한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남자 같은 경우에는 이발하는 횟수를 줄이기 위해
삭발을 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고 합니다.
병원, 세탁소, 약국도 물론 전혀 없습니다.
2000년대 초까지도 통신기지국이 없어서
휴대전화도 사용할 수 없었던 마을입니다.
물론 케이블 TV는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케이블 방송으로 재밌는 일화가 하나 있습니다.
2014년에 KT에서 케이블 방송을 설치하는데,
방송 수신료를 부과하려 했지만,
주민들이 강하게 항의를 해서
수신료도 면제입니다.
대중교통은 93번 버스 노선 딱 1개가 있습니다.
그마저도 1일 3회만 운행을 합니다.
놓치면 마을에 못 들어가게 되는 것이죠.
상수도도 2013년이 되어서야 공급이 되었습니다.
그전까지는 물탱크에 물을 담아서 사용했습니다.
대성동 마을에는 딱 2개의 교육시설이 있습니다.
'대성동 초등학교'와 '대성동 초등학교 병설유치원'
이렇게 2개의 시설만이 마을에 존재합니다.
그렇다 보니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졸업하게 되면,
무조건 중학교부터는 외지로 학교를 다닙니다.
기네스북에 올랐던 깃대에 대한 이야기
쌍둥이 마을로 형성된 대성동 마을과
북한의 기정동 마을에는 보이지 않는 경쟁이
정전협정 이후에도 계속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이로 인해 기네스북에 오른 일도 생기게 됩니다.
서로의 국기를 걸고 있는 깃대의 높이경쟁인데요.
대성동 마을의 깃대높이는 99.8m입니다.
사실 이것도 굉장히 높은 깃대입니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자신의 인공기가 더 높이
있어야 한다는 경쟁심에서 165m로 1982년에
그 높이를 올려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이때 '세계에서 가장 높은 깃대'로
기네북에 등재를 하게 됩니다.
나중에는 타지키스탄과 사우디아라비아의
더 높은 깃대높이인 170m로 타이틀을 뺏기죠.
그리고 2018년에는 예능 최초로 1박 2일에서
이 대성동 자유의 마을을 방문하기도 합니다.
오늘은 남한에서 유일하게 비무장지대에 있는
민간인 마을인 대성동 자유의 마을에 대해
알아봤는데요.
세금과 병역면제라는 혜택이 주어지기 하지만,
거주와 이동, 교육부터 편의시설까지 뭐 하나
제대로 없고, 제약이나 생활등이 너무도 불편한
대성동 마을이긴 하지만,
이 마을은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상당히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마을입니다.
분단의 상징적인 마을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평화와 자유의 의미가 담긴 대성동 마을과
기정동 마을이 언제든지 자유롭게 이동하고,
서로 교류하는 평화적인 날이 왔으면 하는
바람이 생기는 포스팅이었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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