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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nowledge & news

자유시 참변 (자유시사변,흑하사변)

by 40대 아재 2023. 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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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공부하거나 알게 되다 보면

역사적 사실을 기준으로 그 결과가

개인이나 특정집단의 입장이나 상화에 따라

같은 결과임에도 불구하고 한쪽은 희극이 되고,

한쪽은 비극이 됩니다.

이러한 일이 종종 발생되는 역사적 사건 중

'자유시 참변'이라 불리는 사건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40대 중년아재입니다.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자유시 참변이 일어난 스보보드니 수라젭카 위치

 

때는 1921년 극동 공화국 아무르 주에 있는

자유시에서 사할린에서 활동하는 한인 부대가

해당 공화국 인민혁명군에 의해서 진압을 당한

사건으로 우리는 이 비극적인 사건을 

'자유시 참변', '자유시 사변', 또는

'흑하사변'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자유시는 러시아어로는

'스보보드니'라고 부릅니다.

이곳의 근교인 '수라젭카'라는 곳에서 발생했죠.

스보보드니는 '자유'라는 러시아어입니다.

당시 러시아는 러시아 내전 중이었습니다.

 

당시 그곳과 근교에 살던 조선인들은

스보보드니가 조선어로 자유라는 것을 알기에

'자유시'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자유시 부근에는 흑룡강으로 불리는

아무르강의 지류인 제야강이 흐르고 있었죠.

그래서 흑하사변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간도 참변과 자유시 참변 지도 위치와 설명

 

학계에서도 여러 의견이 나누어지기는 하지만,

당시 러시아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의병들은

독립군이 맞다 아니다는 의견이 많이 있지만,

대체로 연해주의 의병 또한 독립군이 맞다는 게

현재까지의 견해로 알려져 있습니다.

러시아의 독립군은 당시 하나로 통합되어 있지는

않았던 것으로 역사가 기록을 하고 있는데요.

당시 '치타'에 수도를 둔 러시아의 소비에트 공화국

극동 공화국은 2개의 한인 단체가 주도권을 가지고

다툼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극동공화국은 1920년 '러시아 내전'당시에

러시아 극동 지역에서 설립된 공화국을 말합니다.

그리고 대립을 하고 있던 2개 단체의 이름은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로 서로 분명한 차이가

있는 단체인데요.

'빨치산'이라고 알고 있는 러시아에서 유래된

'파르티잔' 부대인 대한의용군을 만든 단체죠.

임시정부 제2대 국무총리로 알려진 '이동휘'가

지휘를 하던 단체입니다.

 

빨치산은 우리나라말이 아닙니다. 외래어로써

러시어어인 '파르티잔'에서 유래된 말인데요.

원래는 '파르티'라는 프랑스 말인 '당원, 동지'로

일종의 게릴라전을 펼치는 군벌이나, 정예부대,

특수부대 등으로 이해를 하시면 됩니다.

빨치산을 좌익이나 우익 등에 비교하시는 것은

알고 보면 굉장히 무식한 행동이죠.

예전에 지리산에 들어가서 활동했던 

조선인민유격대의 빨갱이와는 전혀 다른 것이죠.

보통 빨갱이는 공산주의자 또는 사회주의자를

경멸적으로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남은 다른 단체인 이르쿠츠크파는

일제강점기에 한국에서 독립운동이 어려워져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세워진 재외

독립운동 단체입니다.

이들은 '자유대대, 고려혁명군'이라는 무장단체를

만들어서 활동을 했습니다.

 

독립운동이 활발하던 간도의 독립군들은

만주지역 내 활동이 현실적으로 어려워지자

시베리아 극동지역으로 피난을 가게 됩니다.

사실 이때 독립군들은 거의 해체가 된 상태로

러시아로 가기 위해 재집결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독립군이 시베리아 극동지역으로 

피난을 오자 현지 극동공화국의 인민혁명군은

한국 독립군을 좋지 않은 시선으로 봤는데요.

정치적인 이민으로 규정해서 한국 독립군에게

무장해제를 하라고 강하게 요구를 합니다.

 

이때 일부 한국독립군은 이를 무시하고 

가지고 있던 무기를 가지고 가려하는데요.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극동공화국의 사령관은

한국 독립군에 대한 조치를 하게 됩니다.

바로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들어오지 못하게

막으라고 명령을 내린 것이죠.

그리고 무기를 버린 독립군마저 특별한

검열과 조사를 통해서만 들여보내게 됩니다.

그리고 무장해제를 거부한다면 다시 만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하게 됩니다.

 

당시 러시아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홍범도 장군 웃는 모습

 

이렇게 힘들게 들어온 독립군들에 대한

모든 관리를 맡은 것은 처음엔 상해파였습니다.

상해파가 러시아 공산당 극동국 한인부를 토해

극동공화국 정부를 받고 있었다는 이유가

상해파가 독립군을 관리하게 된 이유였죠.

그리고 이들은 대부분이 상해파의 사할린부대인

'대한의용군'으로 편입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습니다.

극동공화국에 들어온 독립군들은 원래 자신들을

지휘했던 지휘관의 말만 듣는다고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부대가 점점 혼란에 빠지게 되죠.

 

한편 이르쿠츠크파는 자신들의 고려혁명군을

중심으로 한인 부대들을 통합해 나가기 시작합니다.

시간이 흘러 한인 부대들을 하나씩 통합한

이르쿠츠크파로 인해서 상해파와 그들의 부대인

사할린부대는 점점 그 힘을 잃게 되죠.

이러다 보니 알고 보면 모두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고 활동하는 독립군임에도 불구하고

부대 통합등의 문제로 갈등이 심해지게 됩니다.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는 각자 단체와 조직등이

완전히 달랐는데요.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 기반단체

상해파-한인사회당

이르쿠츠크파-대한국민의회

 

* 무장조직

상해파-사할린부대(대한의용군)

이르쿠츠크파-자유대대(고려혁명군)

 

* 후원세력

상해파-러시아공산당 극동국 한인부

이르쿠츠크파-코민테른 극동비서부

 

* 한인부대 통합기구

상해파-전한군사위원회

이르쿠츠크파-고려혁명군정의회

 

이렇게 여러 상황을 거치게 되면서 한인부대들은

자연스럽게 두 단체로 나뉘게 됩니다.

인원수는 서로 비슷한데요.

사할린부대는 1,770명으로 기록이 되고 있고,

고려혁명군은 1,920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주제인 자유시 참변의 이유 중

하나가 되는 이 두 세력의 불균형이 생깁니다.

 

니콜라옙스크 사건으로 폐해가 된 마을과 사람들

 

상해파의 중심인 '니항 부대'는 '니콜라옙스크'

라는 흑룡강 어귀 오츠크 해를 만나는 곳에 있는

작은 마을의 이름을 딴 부대인데요.

이 니항부대가 자유시 참변에 가담을 하게 됩니다.

일명 '니콜라옙스크 사건'으로 불리는 학살사건으로

이곳을 점령한 '야코부 트리아피친'이 이끄는

공산 게릴라들은 반대파 숙청이라는 명목하에

마을 주민을 무려 수천 명 가까이

학살을 하게 됩니다.

이때 불과 23세였던 야코부 트리아피친은 

한국독립을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하는 대신

당시 그곳에 있었던 한국 청년들을 꼬셔서 

이 학살사건에 주범으로 참가를 시키게 됩니다.

이때 한국인 부대의 부대장은 교사 출신의

'박이'라는 사람이었는데요.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박 일리아'입니다.

박 일리아의 포섭과 애국심을 사용해서 잔인한

학살사건인 니콜라옙스크 사건의 주요 인물로

한국사람들을 꼬신 것이지요.

 

만주의 김좌진 장군이 이끌던 북로군정서 모습

 

이때 러시아의 군인이었던

야코부 트리아피친의 꼬임에 넘어가 

무자비한 학살사건에 참여해 수많은 민간인과

 

사람들을 죽인 사람들을 피해자로 보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죠.

이때 일어난 사건은 역사적으로도 너무나도

잔인하고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을 정도의

잔혹한 학살사건으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러시아인, 일본인, 중국인 등 여러 나라의

선량한 민간인들을 잔인하게 죽인 학살사건이죠.

이 사건으로 상해파의 사할린부대는 해체됩니다.

 

사실 무장한 독립군은 극동공화국에서 식량을

조달하기 위해서 현지 농민들을 약탈하고,

폭력을 가했다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독립군 입장에서는 식량과 물자조달을 위해서

극동공화국 농민들에게 약탈과 폭력을 했고,

이로 인해 굉장히 서로 대립이 극에 달해 있었죠.

자신들의 나라에 무단으로 들어와서 식량등을

약탈하고 폭력을 일삼는 독립군들을 원망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독립군과 전면적 무장 충돌 직전까지 가는

상황이 되기도 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자유시 참변시 극동공화국 인믾혁명군 지휘관 네스토르 칼란다리시빌리

 

러시아의 군인이자 독립군이 있었던 러시아 극동의

적색 게릴라 지도자이자 아나키스트로 알려진

'네스토르 칼란다리시빌리'는

해당 지역인 자유시에서 독립군에 의한

폭력과 식량 약탈과 농민들과의

충돌등의 이유로 인해서 자유시로 가서 한인부대를

퇴거시키기 위해서 자유시로 향하게 됩니다.

그는 1921년 자유대대의 현지 극동공화국의

인민혁명군 부대의 지휘관으로 임명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자유시에 있던 한인부대들에게 

현재 하고 있는 무장을 강제

해제하도록 명령합니다.

이것이 자유시의 시작이 된 것이죠.

이때 이곳에는 많은 독립군 단체들이 있었는데요.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

홍범도 장군의 대한독립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이범윤의 의군부와  이장녕, 나중소, 지청천,

김규식, 박영희 등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독립운동가들이 있었죠.

 

타국에서 타국의 농민들과 나라에 더 이상의

피해를 주지 않고, 더 이상의 아군의 피해를

원치 않는 독립군의 수장들은 무장해제라는

네스토르 칼란다리시빌리의 명령에 따랐으나,

니콜라옙스크 사건의 주범으로도 알려진

박 일리아 등은 그 명령에 따르지 않고 대항합니다.

그 결과 공격을 받아 수십 명의 사망자와 함께

1,000명에 가까운 독립군은 포로가 됩니다.

바로 이 사건이 '자유시 참변'입니다.

이때 저항하던 독립군의 뒤쪽이 강이어서

더욱 피해가 심했던 사건이죠.

 

자유시 참변 현장 약도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권력싸움과

타국에서 벌인 러시아 내전으로 인한

학살사건의 참전, 그리고 타국에서의 농민과

그들에 대한 약탈과 폭력등이 복잡하게 엮여

자유시 참변을 독립군은 겪게 된 것이죠.

이 사건으로 대한독립군단은 와해가 되었고,

이때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했던 '서일'은

이 사건에 대한 책임으로 자살을 합니다.

그리고 이범석, 김홍일 등의 일부 독립군은

만주에 남아있고, 청산리 전투로 잘 알려진

김좌진 장군도 러시아 이만까지 갔다가

다시 만주로 돌아오게 됩니다.

 

지청천 장군 사진

 

얼마 전 한국으로 유해가 봉환된 '홍범도 장군'과

함께 이르쿠츠크로 이동한 한국독립군

총사령관이었던 '지청천 장군'은 '고려혁명군'을

결성하고 고려혁명군관학교 교장에 취임도 합니다.

 

자유시 참변은 우리 독립군 내 단체의 이념과

여러 다른 생각등으로 시작이 된 사건으로

이국에서 독립운동이 내외적으로 험난하고

힘든 과정을 거쳤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타국에서 남의 나라에서 허락 없이 

무장을 하고, 해당 국민들에게 해서는 안될

식량약탈과 폭행등은 용납이 될 수가 없기에

해당 국가의 무장해제와 더 이상의 피해를

원치 않던 홍범도 장군을 비롯한 여러 지휘관은

그것을 수용한 것이죠.

결국 일본의 간도 참변으로 비롯된

독립군들의 피난처가 된 곳에서 자유시 참변과

같은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을 한 것이죠.

 

스보보드니 마을 입구에 서있는 자유시 참변 표지석

 

2017년에는 스보보드니 외곽의 작은 마을 입구에

'자유시 참변 표지석'이 건립이 되었는데요.

이 표지석에는 이렇게 쓰여있다고 합니다.

"다시는 우리끼리 싸우는 일이 없기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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