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언제 어디서나 스마폰으로 사진을 찍고,
관광지나 여행지에서 손쉽게 사진을 찍는 것은
평범하고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그럼 한국에 최초로 사진을 도입한 사진사는
누구일까요?
그리고 그 사진을 인화하기 위한 한국 최초의
사진관은 누가 열었을까요?
오늘은 이 두 이야기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안녕하세요. 40대 중년아재입니다.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한국 최초의 사진 도입은 조선말기부터 활동한
문신이자 화가와 사진가였던 '어문 황철'입니다.
어문은 황철의 호입니다.
한국 최초의 사진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황철은 1864년 서울에서 태어난 굉장히 큰
재력을 가진 사대부 집안 출신이었으며,
그의 부친은 규장각 제학을 지낸 황윤수입니다.
그의 나이 18살이 되던 해 가내에서 운영하는
함경도의 광산에서 사용할 채굴기계를 구입하러
중국에 건너간 일이 있었는데요.
중국 상해에 머물렀던 황철은 사진촬영술을
우연한 계기에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 상당히 고가였던 사진기계를 구입해서
이듬해인 1883년에 자신의 사저였던 대안동에
사진을 촬영하기 위한 장소를 마련하고,
대궐과 관아에 출입을 하면서 뛰어난 경승과
개화한 고위관료들의 초상을 촬영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라에서 필요로 해서 그린 그림인
'도화서'를 대신해 사진으로 대체하자는 상소를
국왕에게 올리기도 했습니다.
그가 남긴 사진은 80여 점이 되는데,
이 기록사진은 개화기 사회상을 생생히 전해주는
역사유산으로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사진이라는 것이 낯설기만 했던 그 당시에
궁궐등을 찍은 이유로 감옥에 투옥되기도 했죠.
그다음 해인 1884년은 '갑신정변'이 일어난 해인데,
이때 개화파로 지목이 되어 군중들이 난입을 하여
사진을 촬영하고자 만든 공간이 파괴가 됩니다.
하지만, 그는 이듬해 다시 중국 상해로 넘어가
사진기와 관련된 것들을 구입하고, 일본에 가서
일본의 주요 사진관을 시찰한 후 귀국을 합니다.
이때 영선사였던 '김윤식'의 집을 매수해서
사진관을 개설하게 됩니다.
이때 개설한 사진관이 한국 최초의 사진관이라
말을 할 수도 있었지만,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한
사진관이라 공식적으로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럼 공식적으로 한국 최초의 사진관은
누가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을까요?
우리나라 최초 사진관은 '천연당'으로
1907년 현 소공동에서 문신이자 화가였던
'김규진'에 의해서 개업이 되었습니다.
김규진은 본래 서화가인데요. 중국에서 유학한
엘리트 화가였습니다.
귀국 후 나라에서 인정을 받아서 왕실 업무를
총괄하는 궁내부의 통역 담당 부서 외사과
주사의 관직을 맡아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에게
글씨를 가르치는 '서사'를 역임하게 되는데요.
영친왕이 일제의 강요로 일본으로 일본유학을
가면서 그만두게 됩니다.
그때 김규진도 일본으로 건너가서 사진기술을
배우게 됩니다.
글을 얼마나 잘 쓰고 글씨가 좋아서 황태자의
글 선생까지 했던 김규진의 흔적은
부여 부소산성 가장 높은 지점의 조선시대 누각인
'사자루'에 쓰인 '백마장강'이라는 한문으로 쓴
글씨로도 남겨져 있습니다.
또한 가야산에 있는 해인사에서 그가 쓴
글씨를 볼 수가 있습니다.
천연당이라는 사진관을 개설한 김규진은
자신의 집 뒤뜰에 있는 사랑방에 설치를 합니다.
천연당은 상업적인 사진관으로 신문에
개업 광고를 내게 되는데요.
당시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됩니다.
당시 사진을 찍으면 좋지 않다는 미신등으로
여러 좋지 않은 이미지가 있기는 했지만,
한 달에 천 명이 넘을 정도의 손님들이
천연당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습니다.
주요 고객은 사대부와 재력가, 지식인과
고관등의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
사람들로 인해 엄청난 인기를 끕니다.
여러 사대부와 고관등의 사진은 물론이고,
자신의 부인인 이희수와 함께 찍은 사진은
당시로는 상당히 파격적인 시도였습니다.
얼굴을 드러내는 것을 어려워하고 숨겼던
여성들에게 이 사진으로 인해 많은 인기를 끌고,
여성사진사들이 생겨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기생들에게도 엄청난 인기를 끌었죠.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당시 기생들은 천연당에 함부로
들어올 수 없어서, 밖에서 따로
촬영을 하였다고 합니다.
당시 사진값은 1원 이상을 받았는데,
당시 거래된 쌀 한 가마니의 가격이
4원이라고 하니 굉장히 비싼
가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천연당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는 것을
사실 본업으로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이유 중에 하나가 사진을 찍고 나서
외상을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본업보다는 부업으로 생각한 것도 있고,
외상이 너무 많아져서 50%의 금액을 먼저 받고,
사진을 촬영할 정도로 외상이 많아서
운영이 힘들었다고 전해지기도 합니다.
오늘은 중국에서 사진기술과 사진기를 도입해
한국 최초의 화가이자 사진관인 황철과,
황태자의 서사이자 서화가였던 김규진이
만든 상업적 한국 최초의 사진관인 천연당을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는데요.
요즘은 사진을 찍는 사진기도 많이 없어지고,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고 그 걸고 끝인
요즘 사진 찍기보다는 필름 카메라를 통해서
사진을 찍고, 사진관에 맡겨서 사진을 받아서
잘 나온 것을 확인할 수 있었던 그때 그 시절이
가끔은 정겹고 그립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사진 한 장 한 장을 더 소중하게
앨범등을 통해서 보관하고, 간직하고 가족들이
함께 한장한장 넘기며 옛 추억을 떠올리는
그때가 생각나기도 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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