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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천하 한국판 왕자와 거지 실제사건

by 40대 아재 2024.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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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헌법 제1조 2항'은 잘모르지만, 

아마도 이말을 모르시는 분은 없으실텐데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라는 말이 

바로 대한민국 헌법 제1조 2항에 적혀있는 

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의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국민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말인데요. 

실제로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임에도 

여러 공화국을 거치면서, 민주주의와는 조금 

거리가 있는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 중 세계 모든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이야기 중 

'왕자와 거지'와 유사한 내용으로 실제로 있었던 

한국판 왕자와 거지 사건이 있었는데요. 

오늘은 이 이야기를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40대 중년아재입니다.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한국판 왕자와 거지의 배경.

 

'3일 천하 한국판 왕자와 거지'사건은

지금으로부터 67년 전인 1957년

경주와 영천,봉화 그리고 대구등에서

실제로 있었던 사건입니다.

그 사건이 일어난 1957년 무더위가 한창인 

8월 30일부터 9월 1일까지 일어난 일인데, 

요즘 많이 접하는 혐오정치나 권력싸움, 

엉망징창이 된 듯한 대한민국 정치사를 보면 

오늘 소개해드리는 한국판 왕자와 거지 사건이 

굉장히 공감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당시 최고 권력자인 이승만 대통령과 이기붕 부통령

 


당시는 당시 여당이였던 '자유당'시절인데요.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대통령이 무려 3번이나 

집권에 연속 성공하고, 지금 강압적인 일이나, 

마치 독재국가에서나 하는 행동을 보면 

하는 말이 바로 '지금이 자유당 시절도 아니고

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당시에는 조선시대에 

왕이 가지고 있던 권력과 힘을 자유당과 함께 

이승만 대통령이 행사하고 있을 시절입니다. 

그래서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되는 강압적이고, 

일방적인 권력행사를 할 때면 많은 국민들은 

바로 이 자유당 시절의 권력을 떠올리면서 

그 시절의 상황과 비교를 하는 것이죠. 

 

이런 막강한 권력과 힘을 가지고 행사하던 

제1공화국 이승만 대통령의 집권이 3번째 

이어지고 있었던 그 시절에 이제 막 22살이 된

청년 한명이 자신의 상황을 비관하며, 

삶에 대한 고뇌를 하던 중 신문에 실린 뉴스 중 

눈에 띄는 신문기사를 보게 됩니다. 

그 내용은 간략하게 정체 모를 한 청년이 

근무시간에 졸고 있는 헌병의 귀싸대기를 

사정없이 날려버리면서 난리가 났다는 기사인데, 

일반인이라면 바로 처벌을 받아 처리될 사건이 

졸고 있는 헌병의 귀싸대기를 때린 사람이 바로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인 '이강석'이라는 것이였죠.

정체가 밝혀진 이 사건은 그냥 조용히 사라졌고, 

이 내용을 읽은 22살의 청년은 엉뚱하지만, 

대담하기도 한 행동으로 훗날 대한민국을 완전히 

발칵 뒤집어 놓은 주인공이 됩니다. 

권력이 있으면, 죄를 지어도 그것을 언급하지 않는 

당시의 뉴스기사를 보고 그 청년은 결심을 합니다. 

그의 이름은 바로 '강성병' 이었습니다. 

 

왼쪽 진짜 이강석과 오른쪽 가짜 이강석으로 행세한 강성병

 

대한민국 권력서열 3위가 되다.

 

당시 대한민국은 자유당과 이승만 대통령이 

말 한마디로 나라를 좌지우지 했던 시절이였고,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의 파트너이자 부통령인 

'이기붕'부통령이 이승만 대통령의 뒤를 이어서 

권력 2위 서열을 가질 정도로 막강한 권력과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기붕 부통령은 자녀가 3명이 있었는데요. 

장남인 이강석과 차녀 이강희, 그리고 막내인

이강욱까지 총 3남매가 있었습니다. 

 

여러 정치적인 이유가 가장 큰 부분이지만, 

당시 자녀가 없던 이승만 대통령과 부인인 

'프란체스카'여사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죠. 

그래서 이기붕 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자신의 장남인 이강석을 양자로 입적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83번째 생일날 이강석은 

당시 장남은 양자로 입적할 수 없다는 법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양자가 됩니다. 

더군다나, 이승만 대통령과 이강석 나이로 

비교를 한다면 손자가 더 가깝기도 했지만, 

당시 권력을 위해 자신의 장남까지 받치냐는 

엄청난 비난과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기어이 자신의 장남을 보내죠. 

 

이강석은 양자이지만, 이승만의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자녀로 입적이 되고, 친부는 

당시 대한민국 서열 2위인 부통령인 이기붕의 

자녀라는 점에서 말 한마디면 모든게 바뀌었던 

당시 이들의 권력을 생각하면 세상에 무서울게 

하나도 없는 그런 자리에 앉게 된 것이죠. 

다시말해 한 순간에 대한민국 서열 3위에 올라 

무소불위의 힘을 가지게 된 것이였습니다. 

 

왼쪽부터 이강석,프란체스카 여사,이승만,이기붕,박마리아

 

이강석은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친부인 이기붕의 힘으로 서울대 법대에

입학하는데, 당시 불법적이고 말도 안되는

이강석의 입학에 서울대 법대생들의

엄청난 반발에 부딫칩니다. 

이강석이 자신의 친부의 빽으로 그 어떤 노력없이 

서울대 법대라는 지금도 최고의 학벌로 쳐주는 

이곳에 들어온 거 자체가 굉장히 못마땅했죠. 

그래서 서울대 법대 학생들은 이강석이 학교에 

다니게 되면 모두 등교거부를 하면서 결국은 

이강석은 서울대 법대를 중태하게 됩니다. 

그리고 '육군사관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지만, 

관절염을 가진 그는 또다시 중퇴를 하죠. 

나중에는 대한민국 육군 장교를 교육했던 

'갑종간부후보생' 제도를 통해 보병 소위로 

임관을 하게 되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이렇게 친부와 양부의 도움을 통해서 그는 

부족함 없는 삶을 살게 되죠.

그리고 그의 이름은 대한민국 어디에서나 

막강한 권력을 가진 황태자로 인식됩니다.

 

 

 

한국판 왕자와 거지 사건의 시작.

 

1957년 8월 30일 더위가 아직 가시지 않아서 

걷기만 해도 땀이 나는 늦여름이 한창인 날에 

경상북도 경주에 한 청년이 나타납니다. 

그는 위에서 소개해드린 '강성병'이였죠. 

그는 당시 경주에서 가장 먼저 간 곳은 바로 

경주에 있었던 '경주경찰서'로 향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과거 연극경험이 있기도 했지만, 

뛰어난 연기력으로 당시 대한민국을 완전히 

발칵 뒤집히게 만든 사건을 시작하게 되죠. 

사실 강성병은 당시 대학에 계속 떨어지며, 

자신감은 물론, 사회적으로도 굉장히 불만이 

많았던 시기로 앞에서 소개해드렸던 신문의 

이강석에 대한 권력이라면 자신이 무엇을 해도 

용서받을 수 있는 세상에 대한 마치 실험을 하듯 

현재 정치와 권력에 대한 썪은 부분에 대해 

시위라도 하듯 그 생각을 행동에 옮기게 되죠.

 

재판당시 가짜 이강석 행세를 한 강성병 모습

 

강성병은 경주경찰서에 가자마자 자신의 이름을 

당시 경찰서에 있는 사람들에게 크게 말을 합니다. 

'나 이강석이고, 아버지인 이승만 대통령의 명으로 

풍수해 피해 상황에 대한 공무원들의 기강을 보러 

경주에 왔다'고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합니다.

이강석이란 이름을 들은 당시 경찰을 포함한 

그곳에 있던 공무원들은 모두 엄청 놀랐고, 

이 사실을 경찰서 최고 책임자인 경찰서장에게 

바로 보고를 하자마자, 경찰서장은 버선발로 

뛰어나오며 아들뻘 되는 이강석에게 연신 고개를 

숙이며 누추한 이곳까지 오셔서 영광이라며, 

극진한 대접을 하기 시작합니다. 

원래 왕자와 거지에서는 왕자가 원해서 신분이 

뒤바뀐 이야기로 전개가 되지만, 

한국판 왕자와 거지 사건은 거지가 사회의 

불평등과 권력에 대한 반항 아닌 반항심으로 

시작된 실제 사건이였습니다. 

 

황태자의 신분에 모두가 굽신되다.

 

경주경찰서의 경찰서장은 가짜 이강석인 

강성병은 일명 '귀하신 몸'으로 대접을 받으면서 

엄청난 대우를 받게 됩니다. 

실제로 당시에는 거의 없다시피한 TV와 신문외 

그다지 사람 얼굴을 보는게 어려웠던 시절이고, 

마침 강성병의 얼굴은 묘하게 실제 이강석과 

어딘가 모르게 비슷한 모습이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이강석을 못 본 사람이나, TV나 신문으로 

희미한 사진으로 찍힌 이강석을 본 사람마저도 

실제 얼굴과 분간이 어려웠기 때문에 강성병은 

이런 여러가지 상황을 고려해서 막강한 권력을 

등에 업은 황태자 이강석으로 행세를 한 것이죠. 

 

경주경찰서 경찰서장의 연락을 받은 경주시장과 

읍장이나 면장도 모두 가짜 이강석이 있는 곳으로 

몰려와 하나같이 잘 봐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너나할거 없이 갖은 대접과 돈봉투를 넣어서 

건내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경주에서 이런 권력의 맛을 본 강성병은 다음날 

경북 영천으로 발걸음으로 옮기게 됩니다. 

이것또한 귀하신 몸이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움직이는 것이 위험하고 가당치도 않다면서, 

경호원을 붙힌 자가용을 주면서 영천으로 

직접 모셔다 주기까지 한 웃픈 일이 발생합니다. 

 

이승만 당시 대통령 내외와 함께 사진을 찍은 이강석

 

영천에 도착한 가짜 이강석인 강성병은

이곳에서도 경주에서 있었던 일과 같이

영천에 있는 경찰서장의 극진한 대접은 물론,

풍수해를 입은 국민들을 위해 자금을

모아달라는 강성병의 말한마디에 일요일인 

그날 거금인 당시 20만 환을 선뜻

모아 주기도 하죠. 

잠깐이지만, 이런 권력의 맛을 본 강성병은 곧바로 

안동에 가서도 같은 방법으로 돈을 받게 됩니다. 

실제로 진짜 이강석이 임관을 하기전 다녔던 

갑종간부후보생 학교의 교장이였던 육군 준장이 

이강석이 근처에 왔다는 소식에 잘보이기 위해 

차량을 이용해 이동하고 있는 가짜 이강석을 만나 

근처에 왔는데 자신도 만나지 않고 가냐는 식의 

실제 만남도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죠. 

그만큼 당시 황태자 이강석의 파워가 얼만큼인지 

그리고 그 파워를 만들어주는 이승만과 이기붕의 

권력은 얼만큼인지 가늠도 되지 않습니다.

 

비행기를 타기 전 인사를 하는 이강석

 

 

거짓 행세 꼬리를 밣히다.

 

황태자 이강석의 행세를 한지 3일째가 되던 

9월 1일 강성병은 서울에 가기 위해 대구로 

발길을 옮기게 되는데요. 

이 또한 하나같이 자신들의 신분상승과 같은 

잘 보이기 위해 아첨을 하는 여러 사람들로 인해 

당시 경북도청 사찰과장이 이강석의 대구방문을 

알게 되면서 그의 황태자 행세 사건은 조금씩 

꼬리를 밟히게 되는 상황으로 변해가는데요. 

 

마침 서울로 가기위한 대구역에서 기차가 끊기고, 

어쩔 수 없이 당시 경상북도지사 '이근직'의 

관사에 머물게 된 가짜 이강석은 이곳에서도

여전히 극진한 대접을 받게 되는데요. 

수해문제로 출장을 가있던 이근직은 이강석이 

자신의 관사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이강석이 머물고 있는 자신의 관사로 달려옵니다. 

하지만, 당시 경북도지사인 이근직은 실제로 

지금의 청화대가 세워진 장소에 조선시대부터 

붙여졌던 이름으로 대통령이 있던 곳이였죠. 

그곳에서 진짜 이강석을 몇번 봤던 이근직은 

자신의 관사에 있던 가짜 이강석을 본 후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어 바로 자신의 아들을 

불러내어 무엇인가를 확인시키게 됩니다. 

마침 경북도지사 이근직의 아들은 서울대학교 

법대 동창이였기 때문에 이강석의 얼굴은 

아주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경북도지사 이근직의 아들이 이강석이라고 하는 

가짜 행세를 하고 있는 강성병을 보자마자 

이강석이 아니라는 말을 하자 가짜 이강석은 

관사에서 바로 경찰에게 체포가 되게 됩니다. 

이렇게 단 3일만에 권력의 맛을 느낀 후 

강성병은 경찰서로 끌려가고, 경찰과 검찰의 

수사를 받게 된 것입니다. 

 

재판을 받고 있는 강성병 모습

 

알리기가 애매한 사건이 되다.

 

꼬리가 밟혀 경찰서에 끌려간 강성병은 

여러 수사를 받고 있었습니다만, 

수사를 맡은 경찰과 검찰은 상당히 애매한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가짜 이강석 행세를 하면서 

불법으로 돈을 주고 잘봐달라는 요청을 한 

여러 지역의 주요 유지와 공무원들이 엮이고, 

다름아닌 당시 대한민국의 황태자로 불렸던 

이강석으로 행세한 것을 국민들이 알게되면 

굉장히 그 당사자들 입장이 곤란해 지는 이유였죠. 

그러다 검찰 사무실을 자주 다니던 한 신문기자의 

날카로운 시선에 이 사건은 본의 아니게 상당히 

파장을 일으키며 온 나라에 소문이 나게 됩니다. 

이 신문기사를 통해 또다른 신문기사가 나면서 

얼마안가 전 국민이 알게된 사건이 되었죠. 

 

실제로 이강석과 가짜 이강석으로 행세를 해서 

속임을 당한 여러 높은 공무원들과 유지들은 

가짜 행세를 한 강성병에게 상당히 높은 분노를 

가지고 있었던 사건이기도 한데요. 

그럼에도 자신들의 한 행동들이 합법적이거나, 

옳은 행동은 아니였고, 권력에 굴복하면서 

뇌물과 아첨으로 속임을 당한 사건이기 때문에 

대놓고 그 분노를 표출하기도 애매한 사건이였죠. 

그렇다보니 수사를 맡은 경찰과 검찰에서는 

될 수 있으면 이 사건을 조용히 다시 끝내려했죠. 

하지만, 실제 '한국 언론 100대 특종'에도 오른 

이 사건을 한 신문사 기자로 인해 온 나라에 

소문이 나게 되자, 어쩔 수 없이 기소 후 재판을 

통해서 죄를 묻게 됩니다. 

실제로 이 재판을 보기 위해 전국에서 몰려든 

수천명의 사람들로 인해 재판과정이 중간중간 

중지되는 일이 발생할 정도로 당시 사람들에게 

엄청나게 큰 관심을 보였던 재판이였죠. 

 

권력의 실제 검은 모습을 보여주다.

 

재판은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속에서 

열리면서 가짜 이강석 행세를 한 강성병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 하나하나에 많은 사람들은 놀라움과 

요즘 말로 '사이다 발언'에 박수를 치기도 했는데요. 

왜 가짜 이강석으로 행세를 했냐는 물음에

강성병은 "헌병 따귀를 때리고 행패를 부려도

처벌을 안받는 그 권력의 흉내를 내 본것이다"

라는 말을 했고, 그에게 시국적인 악질법이라고

말하던 사람들에게는 "나에게 아첨한 서장과 군수

등 수많은 사람들은 시국적 간신배이다"

라는 말로 권력의 검은 부분를 떳떳하고 자신있게

말하는 모습에 재판 구경을 하던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어내기도 했습니다. 

 

가짜 이강석 행세 사건을 다룬 실제 신문기사 모습

 

비록 누군가를 행세해서 사기나 무전취식을 받고, 

나쁜 짓을 한 것은 분명한 것인걸 잘 알고있지만, 

권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잘못이 있어도 처벌을 

받지 않거나 오히려 숨기는 식의 행태와, 

개인들의 이익을 위해 그 권력에게 뇌물과 아첨을 

가져다 받치는 당시 공직사회의 실제 상황을 

많은 사람들이 알게 한 사건으로도 유명하죠. 

그래서 당시 이 사건에 많은 국민들이 실제로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을 느꼈다고 전해지죠. 

 

 

 

권력이 한순간에 모두 사라지다.

 

이렇게 당시 부통령인 이기붕의 장남이자,

이승만의 양아들로 막강한 혜택과 권력을 

등에 업어 대한민국의 당시 황태자로 있었던 

이강석을 가짜로 행세한 사건은 마무리가 되고, 

결론적으로는 강성병은 재판 후 받은 10개월의 

징역을 살고 나온 후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채 

비극적인 자살로 삶을 마감하게 됩니다. 

 

재판 결과와 훗날 그가 자살한 신문기사 내용

 

그리고 이 사건이 일어난 후 3년이 지난

1960년 대한민국 역사를 뒤흔든

또하나의 사건이 발생하죠. 

그건 바로 '3.15 부정선거'로 대통령을 3번이나 한 

당시 이승만은 또 한번의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 

엄청난 계획들을 실제로 실행에 옮기게 됩니다. 

그건 바로 '부정 투표조작'으로 선거날 전부터 

사전에 준비한 투표용지에 자신과 부통령인 

이기붕에 도장을 찍은 부정용지를 선거함에 

마구잡이로 넣기 시작을 하면서 대통령 선거인 

3.15 부정선거로 이어지게 됩니다. 

 

실제로 이 일로 투표를 한 유권자보다 이승만을 

찍은 부정 투표용지가 더 숫자가 많이 나와서 

급하게 표를 없애기도 한 상상초월 부정선거로 

전국의 대학생이 그가 머물던 경무대로 대규모 

시위와 데모가 일어나면서 나중에는 그 유명한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인 '4.19 혁명'으로 이어져 

결국 부정을 일으킨 당시 이승만과 이기붕의 

권력은 한 순간에 모래성처럼 사라지게 되죠. 

 

3.15 부정선거 개표모습과 그로인한 4.19혁명 시위 모습

 

4,19 혁명이 있고 이승만과 이기붕의 권력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게 된 것을 본 이강석은 

실제로 4.19 일주일 후인 4월 28일에 자신의 

가족을 모두 총으로 죽인 후 자살을 합니다. 

독재적이고, 부정이 가득한 제 1공화국의 

시대가 이렇게 마무리가 된 것이죠. 

 

오늘은 한국판 왕자와 거지 이야기를 실제 

사건을 통해 소개를 해드렸는데요. 

글 서두에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대한민국의 

모든 주권과 권력은 국민에게 나온다는 

헌번 제1조 2항의 내용처럼 국민들을 버리고, 

일부 소수 집단이나 개인의 이익만을 위해서 

권력을 사용하는 불문율과 같은 변하지 않는 

결론은 언제나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괴롭고 

처참합니다. 이건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국민을 위해 국민들이 선출해준 권력의 자리를 

국민이 아닌, 국민을 위한 다스림이 없다면 

그 결과는 언제나 역사가 말해주고 있듯이 

그 결과는 굉장히 끔찍하죠. 

권력을 비꼬아 비록 3일 천하 권력을 맛본 

한국판 왕자와 거지 사건을 통해서 진정한 

국민들을 위해 사용해야 할 막강한 권력들이 

잘못 사용될 경우에는 어떠한 일들이 생기는지 

다시한번 뇌새기는 계기가 되었음 좋겠습니다. 

 

-끝-

더 좋은 이야기로 다음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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