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에 있는 '경회루'는 국보 224호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문화유적 중 하나입니다.
이 경회루에는 많은 이야기와 일화 중
'흥청망청'이란 말도 있는데요.
오늘은 경회루와 흥청망청에 대한 이야기를
포스팅하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40대 중년아재입니다.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경회루는 현존하는 전통 건축물 중
가장 큰 크기를 자랑하는 문화재입니다.
경복궁 근정전 서편에 위치한 누각이죠.
외국사신의 접대나 임금과 신하 사이에
벌어지는 연회장소로 사용할 목적으로,
처음 조선을 창건한 태조 이성계가
경복궁 서북쪽에 작은 누각을 지었으나,
3대 태종 12년에 보다 큰 규모로 새롭게
누각을 짓고, 같은 해 '하륜'이라는
신하를 통해 이름을 짓게 되는데요.
그때 지어진 이름이 '경회루'입니다.
경회라는 이름의 뜻은 '임금과 신하가
덕으로써 서로 만나는 것'이란 뜻으로,
올바른 정사를 펴는 임금은 올바른 사람을
얻어야만 경회하고 할 수 있다는 것을
근본으로 하고 있는 이름입니다.
경회루에서는 외국사신이나 신하들과의
연회장소뿐 아니라 가뭄이 들면 기우제등
국가행사를 위해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단일 건물로서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전통 건축물로 기록되어 있죠.
1395년 태조 4년에 경복궁을 창건하는데,
이때 연못을 파고 누각을 세웠으나,
땅이 습한 이유로 인해 건물이 기울게 됩니다.
이후 태종 12년에 연못을 대규모로 준설해서
동서방향으로는 128m, 남북방향으로는 113m로
굉장히 큰 사각형 연못을 조성하게 됩니다.
경회루의 이름은 하륜이라는 신하가 지었지만,
경회루의 건축은 당시에 최고의 건축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던 '박자청'이 건설을 맡아서,
8개월이라는 기간이 걸려 완성을 하게 됩니다.
이때 완성된 경회루는 사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경회루보다 크기는 작았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경회루보다 훨씬 호화스러우며,
높이 또한 3층 높이의 중층 지붕 전각이었습니다.
1474년 성종 5년에 경복궁을 대대적으로 중수하며,
이때 경회루를 헐고 다시 지었다고 전해지고 있죠.
하지만, 우리나라 문화재 중 상당히 많은 수가
소실되고 없어진 일이었던 임진왜란은 경회루도
빗겨나갈 수 없었습니다.
1592년 선조 25년에 발생한 임진왜란으로 인해서
경회루는 경복궁과 함께 소실이 되고 맙니다.
이후 30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서야 고종 4년인
1867년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지금의 경복궁이
재건이 되면서 다시 세워지게 됩니다.
경회루의 화재를 방지하는 마음에서 경회루 연못에
청동으로 만든 용 2마리를 넣었다는 기록이 있죠.
실제로 1997년 연못공사를 위해서 물을 뺐을 때
청동으로 만든 용 1마리가 발견이 되었습니다.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가 되어있습니다.
나머지 한 마리의 청동으로 만든 용은 지금도
발견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대단하고 역사적인 문화재인 경회루엔
불명예로 불리는 이야기가 하나 있는데요.
'흥청망청'이라는 말이 경회루가 진원지입니다.
흥에 겨워 즐기거나 돈을 함부로 마구 쓰는 모양새
라는 뜻을 가진 말인 흥청망청이라는 그리
좋지 않은 말의 유래가 경회루에서 생겼는데요.
폭군으로 알려진 연산군은 '채홍사', '채정사'라는
벼슬자리를 만들어서 조선 팔도에 있는 아름다운
처녀와 건강한 말을 뽑게 만들고, 미녀와 기생을
관리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기생이라는 명칭도 이때는 '운평'이라고 바꿨죠.
그리고 세조에 창건했던 굉장히 큰 규모의 절인
'원각사'를 없애버리고, 그 자리에 전국에서 뽑은
기생들의 숙소와 기생양성소인 '연방원'이라는
이름으로 운영을 하기도 합니다.
원각사는 현재 서울 최초의 근대공원인
'탑골공원'의 자리에 있었던 절입니다.
그리고 조선시대 최고의 국립대학으로 알려진
성균관 학생들도 다 내쫓고 자신의 유흥장으로
만들어 버리게 되는 만행을 저지르죠.
운평이라는 이름의 기생들을 궁으로 부르면,
명칭이 '흥청'으로 바뀌며 지체가 높아졌습니다.
흥청이라는 용어는 말 그대로 하면
'맑음을 일으킨다'라는 뜻이 되는데요.
연산군일기가 기록되어있는 조선왕조실록은
흥청이라는 뜻을 '나쁜 기운을 씻어 없앤다'
라는 의미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연산군의 마음에 들어서 잠자리를 같이하면
그 이름을 '천과흥청'이라 불리면서 지체가
더욱더 올라가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렇지 못한 흥청은 '지과흥청'이라 불렸죠.
연산군은 경회루 앞에 있는 연못에 배를 띄우고
이들을 불러서 놀이판을 벌였다고 전해집니다.
연산군은 경회루에서 흥청들과 유흥을 즐겼고,
그것이 조선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신하들이
왕을 끌어내린 역사적 사건인 '중종반정'이
일어나는 결정적인 일 중 하나가 되죠.
연산군은 중종반정으로 인해서 왕위에서
쫓겨나고 이후 목숨까지 잃게 됩니다.
그래서 궁에 들어온 기생의 다른 말인 '흥청'과
놀고 마시고 즐기면서 망했다는 말이 바로
'흥청망청'이 생긴 유래가 된 것입니다.
연산군은 창경궁에 처음 만들었었던 경회루를
본떠서 '서총대'라는 누각을 짓기도 했다고 합니다.
서총대는 다음왕인 중종에 의해 철거가 되죠.
그때 서청대 앞에 연못을 또 하나 만들었는데,
봄, 여름, 가을, 겨울 굉장히 뛰어난 풍경을 보여주는
창경궁에 가면 무조건 사진을 찍게 되는 곳인
'춘당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나라 지폐 만 원권 뒤에도 있는 경회루는
대한민국 최대 크기의 건축문화재이자
조선왕조의 대표적인 역사적인 문화재이지만,
흥청망청이라는 말의 유래가 되었다는 것은
조금 안타까운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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