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약 170년 전 황제의 아내인 황후의
자리에 오른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왕후'라고
불리는 여인이 있었는데요.
그녀는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황후이자 왕비로서
지금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기도 합니다.
가장 화려하고, 세상 모든 것을 가진
황후의 삶과, 행복하기만 했을 듯한 그녀의 삶은,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정도의 반전이 있었는데요.
남편인 황제의 바람까지 응원할 정도의 사연과,
가장 아름다운 황후로도 남아있는 그녀의 삶을
하나씩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40대 중년아재입니다.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독일 왕국 외손녀로 태어나다.
1806년부터 1918년까지 독일의
바이에른주와 팔츠 지방을 지배하였던
'비텔스바흐' 가문이 지배하는 '바이에른 왕국'의
이 왕국의 공주였던 '루도비카'와 결혼한
'막시밀리안 요제프 공작'사이에 5남 5녀 중
1837년 크리스마스를 하루 앞둔 이브날에
유난히 미모가 뛰어난 차녀로 태어납니다.
꽤 긴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Sisi(시씨)' 또는
'시시'로 불리는 그녀의 풀네임은 바로
'엘리자베트 아말리에 오이게니'였습니다.
왕가에서 태어난 그녀는 외할아버지인 당시
바이에른 왕국의 왕이었으며, 그녀의 어머니는
그 왕국의 공주였기 때문에, 요즘 흔히 말하는
'금수저'를 넘은 '로얄 패밀리' 집안이었죠.
한 왕국의 공주와 사위였던 그녀의 부모는
왕족이라는 이미지와 다르게 굉장히 자유롭고,
오픈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들의 자녀들은 시시를 비롯해
당시에는 접하기가 어려운 체조와 승마, 체조를
어린 시절부터 즐기면서 성장했죠.
기록에 의하면,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굉장한 미남과 미녀로 기록이 되어 있는데요.
이로 인해 우월한 유전자를 받는 시시는
성장하면서 왕국에 소문이 날 정도의 미인으로
굉장히 많은 관심과 부러움을 받게 됩니다.
그렇게 성장한 그녀는 남모르게 마음속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한 명 있었는데요.
그건 당시 바이에른 왕국의 백작으로 있었던
'리하르트 백작'을 사모하고 있었던 시시는
그것을 우연히 알게된 바이에른 왕국의
공주이자 그녀의 어머니의 반대로 인해서,
리하르트 백작과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되죠.
그 만남을 반대한 이유는 다름 아닌 왕족인
그녀의 신분에 비해 턱없이 낮았던 신분이
그 둘 사이의 인연을 갈라놓게 됩니다.
이후 리하르트 백작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당시에는 치명적인 '결핵'에 결려 사망하죠.
이때 리하르트 백작의 이모가 등장하는데요.
리하르트 백작의 이모는 엄청난 신분과,
왕족인 그녀와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
엄청난 배경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는데요.
'조피 프레데리케 폰'이라는 이름을 가진
훗날 시시의 시어머니이자, 1차 세계대전의
전쟁선포를 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인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어머니였죠.
사실 그녀가 시시와 자신의 아들을 소개한 건
그녀가 시시가 마음에 들어 한 것은 아니고,
당시 독일 북부 지역에 위치했던 또다른 왕국인
'프로이센 왕국'의 '아나 공주'와의 약혼이
깨지게 되면서 시시의 언니였던 '헬레나'와
그녀의 아들인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의
약혼을 재추진 하려고 바이에른 왕국에 들렸죠.
이때 함께 방문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정작 자신과 약혼을 하려 했던 헬레나가 아닌
시시에게 한눈에 반하게 됩니다.
이후 그녀의 어머니인 조피에게 요청을 해서,
시시의 언니인 헬레나가 아닌 시시와 마침내
결혼까지 이뤄지게 된 것이죠.
언니인 헬레나 입장에서는 왠지 자존심 상하고,
시시의 입장에서는 언니에게 미안한 상황이나,
한눈에 반할 정도로 빛이 났던 그녀의 외모는
역사적인 이 사실에도 가늠할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이 결혼은 시시에게 고난과 시련의
시작임을 당시에는 아무도 몰랐던 것이죠.
황후가 된 시시의 힘겨운 시간
1854년 오스트리아 왕실 성당으로도 유명한
'성 아우구스틴 성당'에서 프란츠 요제프 1세와
그가 한눈에 반한 시시는 결혼을 하게 됩니다.
앞에서 잠깐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시시의 부모는
굉장히 자유롭고 오픈된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그들의 아이들도 상당히 자유로운 생활을 하면서
성장해 오고 교육을 시켰는데요.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후가 된 시시에게는
굉장히 엄격하고 보수적인 오스트리아의
왕실법규는 그녀의 숨을 턱턱 막히게 합니다.
그녀의 시어머니인 조피 대공비와 이로 인해서
굉장히 많은 갈등을 일으키게 되죠.
오스트리아 제국의 왕실의 법규로
황후인 그녀에게 기본적인 황실 예법과
오스트리아의 역사, 이탈이어, 프랑스어와
더불어 무용에 이르기까지 한시도 쉴 수 없는
꽉 찬 스케줄로 그녀는 어느새 오스트리아
황실과 굉장한 갈등을 가지게 됩니다.
자유로운 환경과 생활로 성장한 시시에게는
강압적이고, 자유롭지 못한 오스트리아 황실의
여러 가지 강요와 지시는 그녀를 지치게 했죠.
그런 모습을 본 오스트리아의 귀족들도 그녀를
오스트리아 황후로서 자격이 없다는 식으로
그녀를 비웃고 험담하기도 했죠.
실제로 그녀는 오스트리아 황실에서 지냈을 때
음식을 극단적으로 거부하는 등의 증상인
'거식증'까지 겪으면서,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되죠.
그런 와중 그녀는 남편인 황제 사이에서 이쁜
딸인 공주가 태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시어머니인 조피가 그녀의 첫째 딸을
그녀가 원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키운다는 말 한마디로 태어난 아이를
엄마인 시시와 제대로 만나지도 못하게 하죠.
거기에 자기 마음대로 태어난 아이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을 따서 짓기도 합니다.
이 일로 시어머니와 시시의 사이는 더 멀어지죠.
시시가 나은 첫 번째 아이를 할머니인 그녀가
키워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죠.
'교양이 부족하다'라고 말입니다.
시시는 그 다음해인 1856년에도 또 한 명의
자녀를 낳게 되는데요.
'기젤라 루이제 마리 폰 외스터라이히'라는
둘째 딸을 연달아 낳게 됩니다.
하지만, 이 둘째 딸도 시어머니인 조피가
또다시 데리고 가서 키우게 됩니다.
자신이 난 아이들을 키우지 못한다는 괴로움에
자신의 남편인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간절히 부탁을 한 결과 아주 잠시나마 딸들을
키울 수 있게 되지만, 불행히도 첫째 딸이었던
조피가 사망을 하는 가슴아픈 일을 계기로,
둘째 딸마저 다시 시어머니에게 뺏기고 말죠.
2년이 흐른 1858년 드디어 왕실이 바라고 있던
다음 황태자인 남자 아이를 낳게 되는데요.
그가 바로 그녀의 유일한 아들이자 훗날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태자이자, 불과 30세에
안타까운 죽음으로 삶을 끝내게 되는
'루돌프 프란츠 카를 요제프
외스터라이히웅가른' 황태자 입니다.
결혼을 한 황태자와 황태자비가 아닌 또 다른
연인으로 불렸던 다른 여인과 자살을 한 것이죠.
이 사건을 '마이어링 사건'으로 부르고 있죠.
이 사건을 계기로 아버지인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자신의 조카였던 '프란츠 페르디난트'에게
다음 황태자로 임명을 하였으나, 당시 보스니아
수도였던 '사라예보'에서 '가브릴로 프란치프'라는
세르비아계 민족주의자에게 총격을 당해서
사망을 하게 됩니다. 이에 분노한 황제는
세르비아에게 선전포고를 하면서 우리가 잘 아는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된
'사라예보 사건'으로 잘 알려진 역사적 사실이죠.
이렇게 시시의 첫째 딸은 여행 중 사망을 하고,
막내이자 유일한 아들이면서 황태자도
그렇게 안타까운 죽음을 맞게 됩니다.
남편의 외도를 권유하다.
시시는 오스트리아 황실과의 심한 갈등과
자녀를 잃은 여러가지 힘든 상황에서,
그의 남편인 오스트리아 제국 황제였던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편지를 씁니다.
직접 말하지 않고 편지를 쓴 이유는 간단한데요.
오스트리아 황실에 더이상 있을 수가 없을 정도로
갈등이 심하고, 고통의 시간을 보냈던 그녀는
결국 건강이 좋아지지 않아 오스트리아 제국의
안에 있었던 당시 헝가리로 떠나게 되죠.
헝가리는 당시 첫째 딸을 잃은 곳이기도 했지만,
오스트리아와 전혀 다른 자유로운 생활등으로
시시는 헝가리에 굉장히 관심을 가지게 되죠.
훗날 그녀의 헝가리에 대한 관심은 헝가리어를
직접 공부를 하기도 했으며, 자신의 하녀들을
모두 헝가리인들로 모두 교체하기도 했죠.
그리고 옷도 헝가리 옷을 입고 다니기도 했죠.
이 시절에 남편의 외도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그녀는 남편의 외도에 화를 내거나,
원망하는 것이 아닌 전혀 다른 행동으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데요.
그건 바로 남편의 외도를 오히려 권유한 것이죠.
남편을 떠나 먼 곳에 떨어져 있었던 시시는
자신이 없는 남편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보면,
나라를 다스리는 위치에 있는 바쁜 일상과,
자신을 그토록 미워하는 시어머니 사이에서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였던 빈에서 있었던
고통스러운 시간을 피하기 위해 남편과 떨어진
이유를 생각해 보면, 남편이 외도를 하거나,
외도를 해도 이해를 한다는 말을 전하게 되죠.
실제로 '왕관없는 황후'로 알려져 있는 인물인
당시 오스트리아 여배우 '카트리나 슈라트'라는
인물과 사랑에 빠진 것을 안 시시가 남편에게
그녀와의 관계를 인정을 한 것이죠.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임을 잘 알고 있지만,
너무나 괴로운 공간인 오스트리아 황실로의
돌아갈 생각은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정처 없는 여행을 다니다.
이런 시간중에 자신의 유일한 아들이자 황태자인
'루돌프 프란츠 카를 요제프 외스터라이히웅가른'
사망사고를 들은 그녀는 나라에 큰 행사를
제외하고, 항상 검은색 상복을 입은 채
그리스, 포르투갈, 몰타 등을 돌아다니며
아픈 마음을 달래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 헝가리를 오스트리아와 이중국가로
인정하면서 탄생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왕비로도 오르게 됩니다.
그녀는 자신을 자유롭게 대해준 헝가리에 대해서
호의적인 모습을 보였고, 헝가리 인들도 그녀를
상당히 좋아했기 때문에, 이중왕국이 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그녀의 역할이
상당히 큰 이유가 되기도 하죠.
그리고 실제로 그녀가 추천한 인물이 당시
헝가리의 초대 총리로 발탁되기도 하죠.
이것은 자신의 외도와 자신의 어머니인 조피의
아내 시시에 대한 강압적이고 숨막히는 사이를
잘 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였던
프란츠 요제프 1세가 그녀의 요구를 받아들여
이루어진 것이기도 합니다.
다만, 실제로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는
자신의 아내이자 제국의 황태자인 시시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한 것으로 알려졌죠.
비록 그녀의 빈 자리를 따른 여인을 통해
외도를 한 장본인이기도 하지만,
시시를 향한 그의 사랑은 진심이었죠.
유일한 아들이자 황태자가 마이어링 사건이라는
조금은 황망한 죽음과 함께, 비슷한 시기에
그녀의 부모가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렇지 않아도 첫째 딸과 아들, 그리고 제국의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인해 황실로 돌아가지도
못하는 시련의 시간 속에서 시시의 부모와
자식이 세상을 떠난 사실은 그녀를 엄청난
우울증과 정신적 충격에 빠뜨리게 됩니다.
그렇게 그녀는 검은 상복을 입은 채로
정처 없는 삶을 떠돌게 되죠.
'마리 발레리 폰 외스터라이히'는 시시의
4번째 자녀이자 막내딸이었는데요.
그녀를 임신했을 때 그녀는 그녀가 좋아하는
헝가리에서 낳기를 바랬습니다.
그리고 태어난 아이가 남자 아이라면,
헝가리에서 태어나 훗날 헝가리의 왕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가서
그녀를 낳게 됩니다.
아들이 아닌 딸이였기 때문에 왕은 못되었지만,
그녀는 헝가리에서 태어난 막내딸 마리에 대해
유난히 많은 애정을 준 것으로도 유명하죠.
실제로 그녀는 막내딸과 여러 곳으로 여행을
많이 돌아다니기도 합니다.
제국의 마지막 황후의 죽음.
1898년 9월 그녀는 다른 때와 다름없이
이곳저곳을 다니며, 그동안 그녀에게 닥쳤던
아픔과 시련을 견디며 여행을 하고 있었는데요.
이때는 스위스에서 헝가리 백작 출신의 시녀인
'스타러이 이르마'와 함께 여행 중이었습니다.
그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후였지만,
아주 소수의 인원만을 데리고 다녔는데요.
실제로 경호원 없이 시녀만을 동반한 경우가
대부분이라 가명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여러 불행한 일들을 잊고,
도피성 여행을 다니던 그녀 주위에는 항상
여러 신문사등은 그런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가
이슈가 되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위치와 신분은 일반인들에게도 비교적
쉽게 알려지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그렇게 스위스 여행 중 길을 걷는 도중에
이탈리아 무정부주의이자 민족주의자로 알려진
'루이지 루케니'에게 뾰족한 흉기로 가슴을
찔리게 되는 일이 발생을 합니다.
실제로 시시는 당시 자신이 흉기에 찔렸음을
잘 모를 정도로 순식간에 이루어진 일이고,
훗날 그녀를 살해한 루이지 루케니는 특별한
암살훈련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죠.
그렇게 찔린 상태에서 계속해서 피가 나왔으나,
검은 상복을 입은 채 여행을 하던 그녀는
바로 옆에 있던 시녀조차도 잘 알지 못할 정도로
조금 불편한 모습이었지만, 흉기에 찔린 것을
몰랐다는 것이 실제 사실이죠.
당시 허리를 잘록하게 만들기 위해 사용했던
코르셋이 불편해서 그런 것으로 알았다고 합니다.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비틀거리는 횟수가 늘고,
배에 타게 되는데요. 그때서야 흉기에 찔린 것을
발견하게 된 그녀와 시녀는 코르셋을 우선 풀고,
급하게 의사와 간호사를 찾게 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가 탄 배에는 의사가 없었죠.
시녀는 배의 관련자에게 황후의 신분을 알리고,
급히 배를 회항해서 호텔에 가서
의사를 부르지만, 그녀는 시간이 갈수록
정신을 잃게 됩니다.
응급처치만 받아도 될 상처임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출혈로 인해 그녀는 사망을 하죠.
다만, 호텔에서 잠깐 정신을 차려 한 마지막 말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라는 말을 끝으로
그녀는 파란만장한 삶을 끝내게 됩니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60세였습니다.
이 사실을 남편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였던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전해지고,
긴급 수배와 수사를 통해 그녀를 암살한
범인은 바로 스위스에서 잡히게 됩니다.
범인이었던 그는 시시를 암살하기 전부터
암살 후 사형을 받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실제 재판은 그에게 무기징역을 판결했고,
징역을 살던 중 루이지 루케니는 스스로
목을 매 자살을 하게 됩니다.
그녀의 죽음을 전해 들은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업무 중에 그 소식을 전해 들었는데요.
이 소식의 충격으로 실제로 기절을 했습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린 후 그녀에 대한 사랑을
사람들에게 그의 진심을 알리기도 했죠.
가장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이었으며,
죽을 때까지 재혼 없이 혼자 살다 삶을 마치죠.
황제는 사실 시시가 자살하는 상황을 굉장히
걱정을 많이 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그것은 가톨릭 교리에 따라서 자살을 하면,
천국에 가기가 어렵다는 사실에 실제로
암살당한 것에 대해 자살을 해서 천국에
가지 못한 상황은 되지 않아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 정도로 그녀를 사랑했죠.
오늘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황후이자 비운의 삶을 살다 간 시시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는데요.
훗날 스위스에서 그녀를 애도하기 위해서
모인 자리에서 그녀가 잠든 관에 쓰여있는
'오스트리아 황후' 옆에 '헝가리 왕비'라는
이름을 써달라는 헝가리 국민들의 요구가
있을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녀의 유산은 그녀가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사전에 써놓은 유서에 따라 자선단체에 기부되고,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지금도 기억되는
아름답고 존경받는 황후이자 여왕으로 남아있죠.
실제로 그녀가 자주 다녔던 스위스와
헝가리에는 그녀의 흔적을 동상 등으로
지금까지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참고로 그녀는 지금으로 따져도 굉장히 큰 키인
173cm의 신장을 가진 장신이었는데요.
성품과 미모, 키, 출신 가문까지 모든 것을 가진
황후였지만, 힘든 황실과의 갈등과 자녀의 죽음,
그리고 남편의 외도를 권유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처지를 본다면, 정말로 안타까운 삶을
살았는데요. 지금도 가장 아름다운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황후로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남아 있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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