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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뒤집은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박열

by 40대 아재 2023. 8.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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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독립운동가이자

아나키스트로 대담한 배포와 일본여성과의

옥중 결혼으로 일본을 발칵 뒤집은 '박열 열사'에

대해서 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40대 중년아재입니다.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1902년 경상북도 문경에서 태어난 박열은

상주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에 올라와

경기고등학교 사범과로 진학을 합니다.

재학 중 1919년 3.1 만세 운동을 겪게 되는데요.

3.1 운동에 참가한 혐의로 학교에서 퇴학을 당하죠.

퇴학을 당하던 해인 1919년에 그는

일본으로 갑니다.

그곳에서 신문배달등의 힘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고등학교에서 공부를 하게 됩니다.

 

박열 열사의 광복 후 모습

 

고등학교를 다니던 일본에서 그는

사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로 알려진

아나키스트들을 자주 만나게 되는데요.

일본에 간 이듬해인 1920년에

한 조직을 결성합니다.

'동경 조선고학생동우회'를 결성해

활동을 시작하죠.

이후 '의열단'과 '흑우회'등을 조직해서 활동합니다.

그리고 '흑도회'라는 재일유학생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사회주의사상 독립운동 단체에서

활동을 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풍뢰회'라는 이름을 거쳐

흑우회로 개명하여 활동을 계속하게 됩니다.

 

본격적인 독립운동은 동경조선고학생동우회에서

'전국노동자 제군에 격함'이라는 선언을 하는데요.

박열은 1922년에 있었던 이 선언 1년 후에는

'불령사'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해서 자금횡령 등

의심을 사는 사람들을 처벌하기도 합니다.

1923년 '간토 대지진' 또는 '관동 대지진'이 

일본 도쿄도와 미나미칸토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진도규모 8이 넘는 엄청난

지진이 일어납니다.

당시 지진은 지진 시작부터 끝까지 무려 10분 이상

지속된 엄청난 지진으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 지진으로 3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거나

다친 엄청난 지진이었죠.

 

관동 대지진 당시 무너진 건물과 잔해 모습

 

박열은 관동 대지진으로 일본 내 사회 분위기가

굉장히 험악해준 분위기 속에서 당시 동지였던

일본인 부인인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체포가 됩니다.

이후 히로히토 황태자의 혼례식에 암살을 기도한

혐의가 발각이 되어서 재판을 통해 사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을 받았지만, 부인이었던

가네코 후미코는 체포된 지 3년 만인 1926년에

형무소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게 됩니다.

박열은 이후 22년을 복역한 해인 1945년

광복으로 미군에 의해 감옥에서 풀려나죠.

 

박열 열사가 감옥에서 나오는 것을 환영하는 인파들 사진

 

앞에서 박열이 의열단 소속으로 활동을 했다고 

소개를 해드렸는데요.

의열단은 '약산 김원봉'을 단장으로 하는

무장독립운동단체로 당시 치외법권 지역이었던

중국 상하이에서 일본에 대한 독립운동단체죠.

대한민국 임시정부 동맹단체로 단장이었던

김원봉은 일본에서 당시 현상금이 지금으로 환산 시

무려 320억 원이라는 어마어마한 금액으로라도

체포를 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수많은 일본에 대항한 독립운동을 지휘한

의열단의 단장입니다.

일본이 내건 현상금 중 가장 많다고 전해지죠.

박열은 체포되어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의열단에 가입이 되어있냐는 일본의 물음에

자신은 의열단과 관계는 있다고 말합니다.

 

일본 활동당시 박열 열사와 그의 부인 가네코 후미코 여사

 

박열 열사하면 무조건 따라오는 사람이 

바로 그의 일본인 부인인 '가네코 후미코'인데요.

가네코 후미코는 박열보다 1년 뒤인 1903년

이본의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에서 태어났습니다.

무슨 이유인지 그의 아버지는 그녀를

입적하지 않아서 친척집을 떠돌며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이후 한국 충북 청원(현재 세종시)에 살고 있었던

고모의 양녀로 들어가서 한국에 7년간 살게 됩니다.

하지만, 그동안 일본에서보다 더

힘든 학대를 당하죠.

 

박열과 마찬가지로 3.1 운동으로 감명을 받은 후에

일본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무정부주의자인

아나키스트가 되어 1922년 일본에 있었던

박열을 만나게 됩니다.

시인이기도 한 박열의 '나는 개새끼로소이다'라는

글을 읽고 감동을 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항일운동에 투신을 하게 됩니다.

본명 외 '박문자'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하는데,

체포 후 사형에 처해진 당시 이유인

일왕과 황태자의 암살을 목적으로

박열을 도와 의열단과 연계해

폭탄 반입을 함께 추진했죠.

가네코 후미코 여사의 93주기 추도식에서

과거 그녀에게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수여했는데,

그녀의 후손을 통해 박열 열사의 고향이자

그의 기념관이 있는 경북 문경으로 훈장이

기증되어 박열 열사와 함께하게 됩니다.

그녀의 묘는 경북 문경에 조성되었었지만,

일제의 감시 속에서 그동안 방치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1973년 다른 독립지사들이 뜻을 모아

묘역을 정리하고 기념비를 세운 후에

2003년에는 박열의사기념공원 조성과 함께

박열의사기념관 내로 이장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매홀수년 7월 23일에 한국에서

그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추도식이 열리죠.

그리고 반대로 짝수년에는 일본에서 그녀의

추도식이 지금도 열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독립유공자 인정도 받게 됩니다.

 

가네코 후미코 여사의 생전 모습

 

사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일왕과 황태자의

암살이 탄로 나서 체포가 된 것은 아닙니다.

관동 대지진으로 인해서 어수선하고 조선인을

짐승보다 못한 시선으로 보던 일본인들의 보호라는

명분아래 시행된 보호검숙이라는

일본 경찰의 활동에 체포가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폭탄 반입이 탄로 나서

대역죄로 기소가 되어 사형을 받게 된 것이죠.

 

재판장에서의 박열 열사와 그의 부인 가네코 후미코

 

그렇게 해방이 된 조국에서 박열은 일본에서

'재일본조선거류민단'을 조직하고

단장을 맡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김구 선생님과 이승만의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화해를 촉구하는 편지를

보낸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리고 김구 선생님의 요청으로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3명의 의사들의

유해발굴 봉환 위원장을 역임하죠.

그리고 한국전쟁시 납북이 되어 북한의

평양에서 살다가 1974년 향년 71세의

나이로 사망을 합니다.

박열 열사의 본명은 '박준식'입니다.

사후에 정부는 1990년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하고,

독립운동으로 퇴학을 당한 학교의 명예졸업장이

추서가 되기도 했습니다.

 

일본은 관동 대지진이 조선인이 지진이 

일어나도록 빌었기 때문에 지진이 났다면서

어이없는 괴담을 퍼뜨려 조선인을 보이는 대로

학살해서 무려 6천 명이 넘는 조선인을 학살하죠.

이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서 희생양이 필요했는데,

이때 일본인들의 눈에 띈 것이 바로 박열이죠.

하지만, 일본인들의 계략을 눈치를 챈 박열 열사는

오히려 일본인들이 당황할 정도로 당당하고

떳떳하게 대응을 합니다.

 

제노사이드로 인정받아할 관동 대학살 모습

 

지금도 남아있는 박열 열사의 어록을 살펴보면

우선 히로히토 일왕의 아들 결혼식 폭탄 투척

사건에 대한 이유를 재판장에서 물었을 때

박열 열사는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첫째

일본 국민에게 일본의 황실이 얼마나 일본 국민의

고혈을 갈취하는 권력자인지 또한 일본 국민들이

미신처럼 믿고 신성시하고 신격화하는 것의 정체가

얼마나 사악한 귀신과 같은 존재인지 알리고,

일본 황실의 진상을 밝혀서 그 신성함을 땅에 

떨어뜨리기 위함이 첫째이며.

 

둘째

조선민족에서 일반적으로 일본 황실은 모든 것의

실권자이며 민족의 증오 대상이기 때문에

이를 무너뜨려서 혁명과 독립에 대한 조선민족의

열정을 자극하기 위함이었다.

 

셋째

침체되어 있는 일본의 사회운동가들에게 혁명의

기운을 불어넣기 위함이었다.

 

박열 열사와 가네코 후미코의 실제 재판시 사진

 

그리고 또 다른 어록 중에는 이런 말도 있습니다.

 

나는 당연히 용감한 혼을 가졌다.

세상에 어떠한 것이 정말로

무서워해야 할 것인가?

그것을 나는 놈들에게 보여줄 것이다.

생간건대 그들이 내 목을 단두에게 걸 수는

있을지언정 내 손으로 뿌린 씨앗을 태워

부술 순 없을 것이다.

일본에게 입힌 상처를 낫게 할 수는 없다.

중략

내가 일본제국에 준 상처는 영원히 일본의 

몸의 남아 심장을 썩게 해서 마침내는

일본제국을 무너뜨리게 될 것이다. 

나는 승리자다. 영원한 승리자다.

 

그리고 사형을 선고받은 후 박열열사와 그의 부인인

가네코 후미코는 이런 말과 행동을 합니다.

사형선고가 떨어지자마자 가네코 후미코는

만세를 불렀고, 박열 열사는 이 재판이 비열하며,

자신들에게 사형을 선고한 재판장에게 말합니다.

 

"재판장! 자네도 수고했네. 내 육체야 자네들이

죽일 수 있지만, 내 정신이야 어찌하겠는가?"

 

그리고 가네코 후미코는 재판장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박열을 사랑한다. 그의 모든 결점과

과실을 넘어 사랑한다...

우리 둘을 함께 단두대에 세워달라.

함께 죽는다면 나는 만족할 것이다."

 

다정한 모습의 박열 열사와 그의 부인 가네코 후미코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감옥에서 부부가 됩니다.

사형선고를 받기 얼마 전에 옥중에서 정식으로

혼인신고를 해서 합법적인 부부가 되죠.

일본 여성과 조선인의 다정한 모습의 사진이

지금도 너무나도 유명한 사진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당시 일본에서는 이 사진으로 상당히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자기 목숨은 물론이고,

자신의 부인 또는 남편과 함께 모든 것을 바친

박열 열사와 그의 부인 가테코 후미코의 

일본의 탄압과 나라의 독립을 위해 그 누구보다

당당하고 떳떳했던 모습으로 일본을 당황케 한

그와 그녀의 모습에서 주권을 가진 국가로

다시는 이러한 일들이 생기지 않도록 순국선열의

수없는 희생과 정신을 꼭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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