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가장 상징적이고 잘 알려진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벌써
44년 이라는 시간이 흘렀는데요.
5·18 광주 민주화운동에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기억과 기록들이 남아있습니다만,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상징적인 것들 중
'임을 향한 행진곡'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 노래는 정치적으로도 상당히 정쟁의
원인이 될 만큼 많은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데,
오늘은 5·18 광주 민주화운동하면 떠오르는
임을 향한 행진곡에 대한 숨은 이야기들을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40대 중년아재입니다.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최루탄과 연기가 가득했던 시절
당시 국민학교와 중학교를 다니던 시절인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초반에는 상당히
많은 데모들이 여기저기서 발생하던 시절로,
학교에 다녀오다보면, 최루탄과 화염병등
지금은 쉽게 볼 수 없는 것들이 시내 길거리
여기저기에서 볼 수 있었는데요.
최루탄이 너무 독해서 눈물을 한바가지 넘게
흘리면서 학교를 등교하던 기억도 납니다.
특히 대학교 앞에서는 언제나 경찰들과
대학생들이 대치하며, 최루탄과 돌덩어리,
그리고 깨진 유리병 등이 나뒹구는 모습을
그리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던 시절이였죠.
물론 그때는 어려서 물리적으로 충돌하는
데모를 왜 하는지 따가운 눈과 견딜 수 없는
냄새로 원망만 하던 시절이기도 합니다.
다만, 그때가 대한민국에서 민주화를 위한
전국 곳곳에서 데모가 이뤄지던 시절이고,
그 중심에는 1980년 전남 광주에서 일어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영향이 그 무엇보다
컸다는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죠.
5·18 민주화운동과 6·10 항쟁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당시 군부정권이였던 대한민국의 정권이
또다시 군부의 힘을 빌려 정권을 차지하기 위한
전두환의 신군부에 저항하기 위한 민주화운동을
계엄령과 함께 내란으로 판단해서 무차별한
물리적 진압에서 시작된 민주화운동이 바로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고, 실제 기간은
1980년 5월 17일~27일 입니다.
그리고 독재를 연장하려는 전두환 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민주화 항쟁이 바로 6·10 항쟁
으로, 대한민국에서 이 2가지 큰 민주화운동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민주를
누릴 수 없다고 보셔도 되죠.
국가 비상사태시 발령하는 계엄령을 시행해서
계엄군과 당시 광주의 인구 73만 명 중 절반의
시민 시위대가 민주화를 외쳤고,
수백명에 해당하는 시민군이 실제로 계엄군과
물리적인 충돌로 엄청난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한 대한민국 최대의 민주화운동 입니다.
결과적으로 전두환의 신군부의 시민군 진압으로
대한민국에 또다시 군부세력이 집권을 하는
독재가 시작되게 됩니다.
이것은 훗날 전두환 정권의 또 다른 연장선인
'대통령 간접선거'와 민주화를 위한 국민들의
정면 충돌로 발생한 1987년 6월 10일부터
약 한달간 전국적인 대규모 시위로 알려진
'6·10 항쟁'의 가장 큰 이유도 됩니다.
이 항쟁은 지금도 비교적 평화적인 시위로
정권을 바꿨다는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죠.
하지만, 이때도 여전히 가슴아픈 희생들이
발생을 했는데요.
이때 희생된 주요 인물로는 당시 21살
청년이자 서울대 인문대학에 다니고 있었던
'고 박종철 열사'가 신군부의 고문으로
당시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사망을 했는데,
이때 나왔던 말이 영화 '1987'에서도 나온
실제 당시 경찰이 조사결과 한 말과 동일한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입니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어이가 없고 화가 나죠.
그리고 또 한명의 열사인 '고 이한열 열사'로,
당시 연세대 경영학과에 다니고 있었으며,
당시 나이는 20살로 머리에 최루탄을 맞고
연세대 교문 앞에서 사망을 했습니다.
이때 최루탄은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반드시 일반적인 총처럼 수평으로 쏘지않고,
하늘을 향해 포물선을 그리면서 쏴야하는데,
사람을 보고 직접 발사한 최루탄을 맞아서
그자리에서 후두부를 피격당해 당시 근처의
세브란스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안타깝게도
사망을 하고 말았죠.
5·18 민주화운동 시민군 대변인
1980년 5월 27일은 전두환 신군부의 계엄군이
전남도청에서 마지막까지 대치를 하고 있었던
광주 시민군과 광주 민주화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모두 진압하기 하루 전인데요.
이때 당시 시민군의 대변인인 한 사람이 지금도
유명한 말을 남기게 됩니다.
"우리는 오늘 패배하지만,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다."
이 말은 다름아닌 당시 광주 민주화운동 시민군
대변인으로 마지막까지 계엄군과 싸우며,
민주화를 위한 운동을 했던 '윤상원' 입니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 광주에서 그는
전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재학중 이였는데요.
과거 4공화국 유신정권때 유신정권의 독재에
대항해서 공산주의자로 몰아 처벌을 했던 사건인
'민청학련'으로 억울한 옥살이를 한 사람들을 보고,
사회운동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그의 영혼의 단짝인 '박기순'의 설득으로
박기순이 운영하고 있던 힘없고 가난한 노동자에게
노동의식과 여러 가르침을 주기 위해 만든
'들불야학'에서 노동자들을 가르치게 됩니다.
하지만 들불야학에서 힘없고 가난한 노동자들에게
교육을 해주던 그에게 1년 후인 1980년에 발생한
5·18 광주 민주화운동은 그의 인생을 바꿔놨죠.
계엄군이 광주에 도착하자, 자신이 다니던 학교인
전남대학교 당시 총학생회장의 도피를 돕고,
계엄군에 대항하기 위한 여러 행동을 하게 됩니다.
방송국을 장악한 계엄군을 피해 자신이 가르쳤던
들불야학에서 '투사회보'를 만들어 배포하고,
적극적으로 신군부의 계엄군에 대항하기 위한
당시 '민주투쟁위원회'의 대변인을 맡게 됩니다.
그는 계엄군에 대해 굉장히 강한 투쟁의식으로
당시 무기를 반납하고 투항하자는 일부 사람들에게
총을 겨누며 항복하는 것을 반대했죠.
그리고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마지막 저항지인
전남도청에서 계엄군의 총을 맞아 사망을 합니다.
한편 그에게는 어린시절 윤상원이 아닌 이름으로
고등학교 전까지 사용을 하고 있었는데요.
윤상원이란 이름은 개명 후 이름입니다.
그 전까지는 '윤개원'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는데,
개명을 한 이유가 한 점쟁이가 이름을 바꾸지 않으면,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난다는 점괘를 하는 바람에
이름을 윤상원으로 바꾼 것이라 전해지는데요.
안타깝게도 바꾼 이름인 윤상원 이라는 이름으로
신군부 계엄군의 총에 맞아 사망을 한 것을 보면,
정말 안타깝기도 하고, 아이러니 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5·18 광주 민주화운동 사망자 영상에는
이름을 바꾸기 전 이름인 '윤개원'으로 나옵니다.
들불야학의 설립자이자 노동운동가
앞에서 소개해드린 5·18 광주 민주화운동에서
마지막까지 신군부 계엄군에 대항하며,
민주화를 위한 마지막 생명을 태웠던 윤상원과
자신이 설립한 들불야학에서 가난하고 힘없는
노동자들에게 교육을 통해 노동의식과 함께
민주화를 위한 여러 교육을 했던 인물인데요.
그녀의 이름은 바로 '박기순'입니다.
박기순은 윤상원과 7살 차이가 나는 사이로,
그녀 또한 전남대학교에서 국사교육과에 입학해
대학생활 중 민주화를 위한 학생운동을 하다가
2년 뒤인 1978년에 정학을 맞게 되기도 하죠.
이 일로 그녀는 노동자들의 열악한 교육환경과
시대를 앞서간 교육에 대한 열정을 통해,
정학을 맞은 그 해에 '들불야학'을 설립해서
많은 노동자들에게 조건없는 배움을 주게 되죠.
하지만,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 발생을 하는데요.
들불야학을 설립한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그 해
12월 크리스마스가 하루 지난 26일 그녀의
친오빠의 집에서 머물고 있던 그녀에게 당시
난방을 위해 사용했던 연탄에서 일산화탄소가
누출이 되면서 그녀는 사망을 하게 됩니다.
이 일로 그녀와 함께 들불야학에서 노동자들을
가르쳤던 윤상원이 그녀의 뜻을 이어가기 위해
들불야학을 그녀의 뒤를 이어 운영하게 되죠.
그리고 2년 뒤인 1980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
발생 9일 만인 5월 27일에 그도 사망을 합니다.
우선 '임을 위한 행진곡'의 원래 이름은
'님을 위한 행진곡'으로 시작을 했는데요.
이것은 표준어 규정에 따라 바뀐 것으로,
원곡은 물론 본래의 제목은 '님'이 맞습니다.
1982년 소설가 '황석영'이 시민사회운동가이자
시인인 '백기완'이 쓴 '묏비나리'에서 나오는
일부의 내용을 사용해 작사를 한 노래이고,
작곡은 세종시문화재단의 대표를 맞고 있으며,
당시 전남대에 다니고 있었던 '김종률'이 했고,
첫 녹음은 작사를 한 소설가 황석영의 자택에서
당시 계엄군의 눈을 피해 온 집안의 창문을
담요로 다 막아놓고 했다고 전해지고 있죠.
임을 위한 행진곡을 만든 이유는 바로
앞에서 소개해드린 윤상원과 박기순의
영혼의 결혼식을 담아 만든 노래인데요.
민주화 운동에 목숨을 바쳐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윤상원과 박기순이 생전에
하지 못한 결혼식을 죽어서라도 할 수 있도록
영혼의 결혼식을 통해 그들의 넋풀이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만든 것이죠.
이 노래를 배우고, 녹음하면서 생긴 일들은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979년에 작곡가인 김종률씨가 대학가요제에서
은상을 차지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당시에는 노래와 같은 공연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경찰서에 신고를 하고 했어야 했는데,
김종률씨의 대학가요제 수상 경력을 본 경찰이
상대적으로 조금은 쉽게 공연을 허락했고,
이후 그 이야기를 들은 전라북도 익산(이리)
출신인 가수이자 작곡가,편곡가,연극연출가 등
다방면에 뛰어난 실력을 갖춘 '김민기'가
서울에서 광주로 내려오게 됩니다.
그는 양희은이 부른 '아침이슬'이라는 전설적인
노래의 작곡가로 잘 알려진 분이기도 하죠.
이렇게 알려지지 않은 여러 민주화 운동가와
많은 노력들이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힘을 합쳐 활동을 합니다.
그냥 하기도 힘든 이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계엄군과 경찰에 발각되어 심한 고문도 당했고,
수많은 상처를 몸에 새기면서도, 민주화를 위한
민주화운동은 계속되었던 것이죠.
그런 과정 중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이 발표되고,
민주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노래가 되면서,
지금까지 임을 위한 노래는 이어지고 있죠.
임을 위한 행진곡 논란들
1990년대와 2000년 초까지는 임을 위한 행진곡은
대한민국에서 민주화운동의 자랑스럽고 상징적인
노래로써 국가 행사에서도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기념식과 같은 곳에서 너무나도 당연한 것으로
함께 불리고, 공식행사의 마무리로 인정했죠.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세분의 대통령이 재위시절엔
전혀 문제되지 않던 이 노래가 보수정권으로 바뀐
대한민국에서는 그때부터 이 노래가 마치 문제가
있는 노래인 것으로 취급되면서 논란이 발생합니다.
실제로 2008년 새롭게 들어선 보수정권 시절에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면, 경찰이 잡아간다더나,
또는 국가보안법에 위반되는 행위로 간주가 되어,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유언비어가 쏟아졌죠.
실제로는 말도 안되는 말들이였죠.
하지만, 당시 보수정권은 이듬해인 2009년에
열린 5·18 광주 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전 국민이 분노하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건 바로 언제나 행사의 마지막에 참석자
모두가 제창을 했던 내용을 아예 빼버리고,
그들이 준비한 합창단만 부르는 방식으로
변경을 하는 어이없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이 사건으로 분노한 전 국민은 물론이고,
5·18 유가족회를 포함한 여러 시민단체는
당시 정부의 공식 행사외에 별도로 광주에서
따로 5·18 광주 민주화운동 기념식을 엽니다.
이후 이어진 보수정권에는 이때 국민들 분노를
과거에 봤음에도 불구하고, 합창단만 부르던
임을 위한 행진곡을 참석자가 따라 부르는 식의
기념식을 준비하면서, 또 다시 전 국민들의
분노와 논란은 계속되게 됩니다.
하지만, 2017년 취임한 문재인 대통령의 지시로
취임한지 단 2일 후인 5월 12일에 곧바로
5·18 광주 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제창을 지시해
약 9년만에 임을 위한 행진곡이 제창이 되었죠.
보수정권시절 5·18 노래를 별도로 만들어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아예 부르지 못하도록
새로운 노래에 대한 예산을 편성한 적도 있죠.
당시에 전 국민적인 저항과 반발에 이 내용을
주관한 보훈처는 뭇매를 맞기도 했습니다.
당시 보수정권이 이렇게 악착같이 이 노래를
부르는 것에 반대한 이유는 도대체 뭘까요?
여러 이유들이 있습니다만, 작사가로 알려진
'황석영'이 북한과 관련된 인물이라는 것인데,
1989년 조선문학예술총동맹의 초청으로
일본과 중국을 경유해서 북한에 간 적이 있는데,
이때 한국민족예술인연합의 대변인 자격으로
북한에 다녀온 일이죠.
이 시기가 조금 다른 때와는 사뭇 달랐던 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으로 기록이 되어있는데요.
그 시기는 남과 북의 상호교류와 이산가족등
공산권 국가들과 교류가 본격화된 시기로,
이 방문을 두고, 북한과의 민간부분에서의
통일운동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었죠.
이후에 북한에 머무르면서, 문화교류와
남과 북이 서로 협력해서 하는 사업등에
합의를 하는 등의 활발한 활동을 했는데요.
중요한 건 이때 남쪽에서는 그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사법처리르 하겠다고 한 것이죠.
그러자 그는 남한으로 돌아오지 않고,
해외를 돌아다니며, 북한을 여러번 방문해서
당시 북한 지도자인 김일성을 만나기도 하죠.
시간이 흐르고, 1993년 한국으로 귀국하는데,
바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가 되어지나,
5년 뒤 대통령으로 취임한 김대중 대통령의
특사로 감옥에서 나오게 됩니다.
이후에도 북한에 정부의 허락을 받아 다녀온
사실도 실제로 있습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많은 이야기가 나오고 있지만,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임을 위한 행진곡 작사는
시인 백기완이라고 알고 있죠.
실제로도 백기완 시인은 자신이 작사가로 말했고,
임을 향한 행진곡이 누구나가 부를 수 있도록
저작권을 행사하지 않겠다라는 말을 남겼죠.
그럼 마지막으로 임을 향한 행진곡이란 제목에서
'임'은 도대체 누구를 의미한다고 봐야 할까요?
우선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윤상원씨와 박기순씨의
영혼 결혼식과 민주화 운동을 알리기 위해서
만든 노래라고 소개를 해드렸는데요.
'임'은 바로 윤상원을 포함한 5·18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안타깝게 사망한 민주화를 위해 희생된
시민들을 의미하는 것이죠.
윤상원씨와 박기순씨의 영혼 결혼식인 넋풀이와
민주화운동을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운 시민들이
바로 임을 향한 행진곡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죠.
실제로 임을 향한 행진곡을 위해 모인 문인들은
이 노래가 윤상원과 박기순의 영혼 결혼식과,
5·18 광주 민주화운동으로 희생된 시민들을
'임'으로 보고 악보 원본에 제목을 적었다 합니다.
다시말해 임을 향한 행진곡은 어는 한사람이
아닌 여러명이 만든 공동 창착 노래이죠.
오늘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상징적이고 큰
민주화운동으로 알려진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임을 향한 행진곡과
그 숨은 이야기에 대해 소개해 드렸는데요.
지금도 여전히 분명한 것은 독재에 저항하여,
민주화 국가를 위해 안타깝게 희생한 당시
그분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민주국가로 발전하기 어려웠을 것이며,
그 민주화운동을 상징하고 위로하는 노래인
임을 향한 행진곡이 만들어진 너무나 명확한
그 이유들에 대해서는 절대로 그 누구라도
부정을 하면 안된다는 것이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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