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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놀랍고 흥미로운 직업

by 40대 아재 2024. 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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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여러 가지 직업들이 

존재하고 있는데요.

기술의 발달과 여러가지 이유 등으로 인해 

어떤 직업은 없어지고, 어떤 직업은 새롭게 

생기는 현대사회에 살고 있죠.

그 많은 직업들은 과거로부터 이어져서 

지금까지 내려오는 직업들도 있죠.

그럼 우리 선조들이 살던 시대 중 조선시대에 

있었던 직업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조선시대에 있던 많은 직업 중에 흥미로운 

직업이 몇가지 있는데요.

오늘은 조선시대에 있던 흥미로운 직업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40대 중년아재입니다.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 조선시대 있었던 흥미로운 직업들

 

1. 마경장

 

현대에 살아가면서 하루에 최소 한번 이상은 꼭 

사용하는 물건 중 하나가 바로 거울인데요.

과거 조선시대에는 지금처럼 유리로 만들어진

거울이 아닌 청동이나 백동으로 만든 금속거울이

주로 사용된 거울이었습니다.

유리거울이 아닌 금속거울이다보니 사용을 하면

습기나 땀 등에 약해서 쉽게 녹이 슬기도 했죠.

당시 대부분의 거울 재료였던 청동이나 백금은

금속 특성상 수시로 녹을 벗겨내고 갈고닦아야

거울로써의 기능을 원활히 할 수 있었죠.

 

조선시대 금속거울과 마경장이 거울을 연마하는 그림

 

금속거울을 거울 본연의 기능과 빛나도록 

선명하게 되돌리는 일을 했던 사람이 있는데요.

그 직업이 바로 '마경장'입니다.

마경장은 경려석이나 중려석,연일여석,법유 등 

금속거울을 연마하고 거울의 기능을 똑바로

하기 위해 녹슨 금속거울을 광을 내고 연마해

녹슬고 뿌해진 거울을 다시 깨끗한 거울로

만드는 당시 꽤 전문성을 가진 자만 할 수 있던

조선시대의 직업 중 하나입니다.

훗날 유리거울이 나오면서 '마광장'으로 불리며

지금으로 따지면 광택을 내는 사람으로서

집안에 있는 오래된 금속물건이나, 무신의 경우

갑옷과 같은 금속으로 만든 물건들을 광을 내서

새것처럼 만드는 일을 했던 직업입니다.

 

2. 매품팔이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매품팔이'라는 직업은 

다른 사람 대신 매를 맞아서 생계를 이어가던

과거 오래된 직업 중 하나인데요.

가장 우리가 흔하게 알고 있는 '곤장'등으로

형벌을 집행할 때 대신 곤장을 맞아줌으로써

자신의 주인이나, 또는 자신에게 의뢰를 한

사람에게 돈을 받고 대신 매를 맞는 직업이죠.

목숨을 걸고 하는 직업이기 때문에 당시에도

웬만한 담력이나 맷집이 없으면 하기 어려운

직업 중 하나였습니다.

 

매를 대신 맞고 돈을 벌던 매품팔이 곤장 때리는 모습

 

사실 매품팔이는 처음부터 돈을 받고 매를 맞는 

직업은 아니었는데요.

죄를 지었으나 나이가 든 부모를 대신해서 

매를 대신 맞는 경우는 종종 있었습니다.

그리고 노비가 주인을 대신해서 매를 맞는 

그런 상황도 비일비재했던 시절이었죠.

훗날 세종대왕님은 자식이 부모를 대신해서 

매를 맞는 것을 법으로 금지시키기도 했죠.

다시 말해 그때까지는 흔한 일이었다는 것이죠.

그리고 매품팔이가 직업인 사람인 경우에는 

실제로 매를 때리는 관리에게 뒷돈을 줘서 

조금 약하게 매를 맞도록 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곤장을 맞아 죽은 사람이 많았던 

과거 조선시대를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었죠.

 

3. 거벽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어이없는 

조선시대의 직업이 하나 있었는데요.

그 이름은 바로 '거벽'입니다.

거벽은 지금으로 따지면 국가고시를 대신 

응시해서 치르는 사람을 말하는데요.

쉽게 말하면 대리로 시험을 당사자 대신 

봐주는 사람이었던 것이죠.

 

시험을 대신 봐주는 거벽 모습

 

사실 조선시대에 있었던 과거시험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철저하지는 못해서 

돈을 받고 대신 시험지를 작성해 주는 거벽이 

생길 정도로 엉망인 시절이 있었습니다.

시험을 보는 자리도 대신 맡아주는 사람도 

있을 정도로 관리가 허술한 시절이 있었죠.

이런 사람들은 '선접꾼'이라고도 불렀습니다.

 

돈을 많이 주면 장원급제까지 대신 만들고, 

돈의 많고 적음에 따라서 등급을 결정해서 

의뢰인에게 돈을 받을 정도로 대단한 거벽 중 

실제 '유광억'이라는 사람도 존재했습니다.

조선시대에 총 치러진 과거시험은 총 800회로 

그 시험에서 15,000명의 합격자를 배출해서 

나라에서 일할 관리를 배출했죠.

과거시험 자체가 대게 넓은 공터에서 실시해서 

'현제판'이라 불리는 곳에 시험문제를 붙여 

그와 관련된 내용의 답을 쓰는 과거시험은 

현제판, 즉 시험문제를 가까이에서 보고 

빨리 제출하는 것이 합격에 유리했기 때문에 

앞에서 말씀드린 선접꾼과 거벽의 직업은 

당시에 굉장히 인기가 있던 직업이었죠.

 

4. 가체장

 

'가체장'은 지금으로 따지면 헤어디자이너입니다.

조선시대에 살았던 여성들은 머리숱이 많은 

'가체'와 '비녀'를 통해 몸을 치장하곤 했는데요.

흔히 역사드라마에서 여성들이 머리에 무거운 

땋은 머리들을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요.

가체는 머리숱이 많아 보이게 하기 위해서 

머리 모양을 만들어 머리에 얹거나, 땋은 것을 

가체라고 부릅니다.

바로 이 가체를 만드는 사람이 가체장인데요.

조선시대 가체는 여성들에게 엄청난 인기로 

무거운 가체를 오랫동안 사용을 해서 목부상과 

값이 꽤 나가던 가체장을 사기 위해서 자신의 

가산을 탕진하는 경우까지 생길 정도로 굉장히 

인기를 끌던 헤어아이템 이었던 것이죠.

 

조선시대 가체와 가체를 만드는 모습

 

지금은 아주 흔한 일이기도 하지만, 머리색을 

탈색해서 가체장을 만들기도 하고, 

여러 가지 머리를 땋는 법은 물론 뛰어난 

손재주가 있어야 하는 가체장은 그 당시에 

인기 만점인 헤어디자이너라고 볼 수 있죠.

영조와 정조 때 가체가 사회문제까지 되면서 

금지령을 내렸지만 그 인기로 인해 완전히 

사라지지 않다가 순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가체사용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5. 다모

 

드라마를 통해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죠.

바로 '다모'인데요.

다모는 사실 조선시대에 차를 즐겨마시던 

고위관리들에게 차를 가져다주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 관청에 소속된 노비인 관비였죠.

그런데 다모는 차 심부름을 하던 일 외에 

다른 일들을 하기도 했는데요.

그게 바로 '여자 형사'로 표현을 하면 딱 맞는 

숨어있는 죄인을 잡아들이는 일을 했죠.

 

조선의 여자 형사역할을 했던 다모

 

다모가 이런 일을 한 이유가 있는데요.

'은군자'라는 기생이나 애첩을 이르는 말인데, 

성리학과 유학으로 남녀유별에 유난했던 

그 당시에는 일반 남성 포교들은 은군자들의 

집에 함부로 들어가는 것을 할 수 없었죠.

이때 다모가 은군자의 집에 들어가서 숨어있던 

죄인을 데리고 나와서 관가에 데리고 오는 일을 

바로 다모가 대신해서 한 것이죠.

그렇다 보니 다모를 뽑을 때 기준이 있었는데요.

당시 키가 최소 150cm 이상에 쌀 5말을 번쩍 

들 수 있어야 했으며, 술인 막걸리도 3~4 사발은 

쉽게 마실 수 있어야 한다는 기준도 있었죠.

 

6. 체탐인

 

'체탐인'은 몸소 알아본다는 뜻을 가진 말로 

지금 말로 따지면 바로 '스파이'를 말하는 것이죠.

적진에 직접 침투해서 적의 정보를 수집해서 

그 대가로 돈을 받았던 조선 초 직업입니다.

특히 압록강 근처 여진족과의 끊임없는 마찰로 

체탐을을 고용해서 여진족의 동태를 살피면서 

전쟁에 유리한 상황을 만들고, 작전을 짜는데 

정보를 주었던 체탐인은 세종대왕 시절에 

가장 활발한 것으로 기록에 남아있죠.

 

지금의 스파이 역할을 했던 체탐인

 

체탐인은 목숨을 걸고 했던 직업 중 하나이기에 

굉장히 몸놀림이 좋고 용감한 사람을 썼는데요.

여진족이 있었던 북방 쪽은 물론 일본인들이 자주 

드나들었던 남해안까지 그 영역에는 한계가 없었죠.

하지만, 적에게 생포당해서 고문을 당하거나, 

심할 경우에는 목숨까지 잃기도 했습니다.

남아있는 기록으로는 임진왜란 당시까지는 

체탐인이 활발하게 활동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죠.

그리고 체탐인은 징병된 군인 중에서 뽑았는데, 

큰 공을 세우거나 하는 경우에는 무관도 되었죠.

 

7. 월천꾼

 

산과 개울이 많은 당시 조선시대에는 

사람들을 등에 업거나, 목에 태워서 개울이나 

강을 건네주었던 직업을 만들었는데요.

그 직업이 바로 '월천꾼'입니다.

월천꾼이라는 직업이 생긴 이유는 조선의 지형과 

또 다른 큰 하나의 이유가 있었는데요.

그건 바로 조선시대에는 여성이 아무 곳에서나 

신발을 벗을 수 없었던 문화가 있었기 때문이죠.

여성이 맨발을 보인다는 것은 그 당시에 

엄청나게 심각한 노출을 의미했기 때문이죠.

 

조선시대 월천꾼 모습

 

깊이가 깊은 강이나 개울은 나룻배를 타고 건너고, 

물이 깊이가 얕은 곳에서는 배가 다닐 수 없어서 

다리가 없는 경우라면 무조건 월천꾼의 도움으로 

개울을 건너야만 했던 것이죠.

남성의 경우도 양반의 경우에는 밖에서 신발을 

벗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과, 여성의 경우는 

밖에서 신발을 더욱더 벗을 수 없었기 때문에

월천꾼은 조선시대 개천이나 여울에서 비교적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월천꾼이 4계절 내내 월천꾼을 하는 것은 아니고, 

여름 장마에 개울에 물이 불어서 깊어지거나, 

겨울철에 얼음이 얼거나, 녹기 전에 활동합니다.

그렇다 보니 월천꾼의 첫째 조건은 키가 커야 하고, 

힘센 장정만이 할 수가 있었던 직업이었죠.

초기에는 등에 업거나 목말을 태워 건너다가 

가마를 통해 사람이나 짐을 옮겨주기도 했죠.

 

8. 멸화군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직업으로 

자신을 희생하면서 다른 생명을 구하는 직업인 

소방관들이 있는데요.

조선시대 소방관이 바로 '멸화군'입니다.

이름 뒤에 ''이라고 붙은 것을 보면 멸화군은 

불을 끄는 군인을 의미하죠.

조선초기 한양에서 엄청나게 큰 불이 나는데, 

이때를 계기로 불을 전문적으로 끄게 만드는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만든 것이 

바로 불을 끄는 군인인 멸화군입니다.

 

지금 소방관과 같은 조선시대 멸화군

 

멸화군은 불을 끄는 일은 물론 화재예방활동을 

하기도 했고, 평상시에는 화재를 감시하고, 

관청과 민가에 불을 끄는 도구를 비치해서 

그것들을 감독하기도 했습니다.

지금 40대 후반 이상인 분들은 아시는 제도인 

과거 야간통행금지가 있었던 조선시대이기에 

아무나 야간에 돌아다닐 수 없었는데요.

멸화군은 자신들이 멸화군이라는 구화패를 

가지고 다니면서 화재가 나도 통행금지시간에 

신속하게 화재가 난 곳으로 이동이 가능했죠.

 

9. 떼꾼

 

조선시대는 도로사정이 지금처럼 좋지 않았기에 

크고 무거운 것들을 이동하는 것은 쉽지 않았죠.

당시 가장 많이 사용하던 목재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강물을 이용하여 목재를 운반해 주는 

새로운 직업이 생기게 되는데요.

바로 '떼꾼'입니다.

실제로 매년 4월에서 10월 말까지 강원도에서 

한양까지 오는데 5일이 걸렸는데요.

엄청나게 고되고 힘든 일이었기 때문에 떼꾼을 

당시 상당히 높은 돈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생긴 말이 바로 '떼돈'이죠.

 

떼돈을 번다는 유래를 만든 조선시대 떼꾼

 

농사일이 없어지는 농한기가 되면 강원도 백성은 

떼꾼으로 일하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위험하고 힘들지만 돈을 많이 받을 수 있어서 

아예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었죠.

떼꾼을 단지 강물로 나무를 옮겨주는 것이 아닌 

실제로 나무를 벌목해서 8~10개로 묶은 다음 

강물에 띄워서 경험이 많은 키잡이와 함께 

5일 동안 한양으로 목재를 옮기는 일을 했죠.

가다 보면 수없이 많은 돌부리와 물살이 센 

지역에서는 실제로 물에 빠져서 목숨을 잃는 

떼꾼들도 있을 정도로 위험한 직업이었죠. 

그렇다 보니 당시 군수의 월급이 20원 일 때 

한양까지 목재를 나르면 받는 돈이 30원으로 

지금으로 따지면 5일 만에 수백만 원을 벌어 

떼돈을 번다는 말의 유래가 될 정도로 

위험한 직업이었습니다.

 

10. 겸인(청지기)

 

요즘 많이 사용하고 듣는 말 중 하나가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을 '집사'라고 하죠.

그 대상은 다르지만 주인을 대신해서 집안일 

모두를 관리하는 사람을 '겸인'이라 했습니다.

보통 겸 인은 양반집에서 여러 자질구레한 일을 

맡아보거나 시중을 들던 사람을 말하는데요.

'청지기', '소사', '통인'이라고 부르기도 했죠.

예전 학교에서 학교일을 하시던 분들을 

소사, 소사아저씨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겸인, 청지기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조선의 집사인 겸인은 집안 모든일을 책임지는 직업이였죠

 

집안의 가내 비서역할을 했던 겸인은 

주인에 따라서 자신에게 충성한 겸인을 

관리로 취직시켜 주기도 했기 때문에 

겸인의 주인에 대한 충성은 굉장했죠.

관리로 취직을 해도 자신의 주인에 대한 

관계는 유지를 할 정도로 주인과 겸인은 

상당히 강한 신뢰와 의리로 연결되어 있었죠.

 

겸인은 보통 신분이 중인 출신이 많았는데, 

노비가 하던 일들은 하지 않는 대신에 

자질구레한 모든 집안일들은 모두 했죠.

주인의 모든 것은 물론 집안의 관혼상제등 

집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대소사를 챙겼죠.

그리고 글과 문서작성도 능숙해야 했기에 

집안은 물론 외부와 관련된 모든 일들을 

손바닥 보듯이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역모등의 죄로 처벌할 때 

그 주인의 겸인을 가장 먼저 체포해서 

정보를 알아냈다고 할 정도였죠.

 

오늘은 이렇게 조선시대 흥미로운 직업과 

그 내용에 대해 알아봤는데요.

직업에는 귀천이 없죠. 어떤 일을 하기보다 

자신의 일을 얼마나 자긍심과 책임감으로 

자신의 일에 만족을 하냐가 중요합니다.

요즘은 어떤 직업이든 돈만 많이 벌면 

그 직업이 최고라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직업에 있어 가장 중요하고 확실한 것은 

자신이 그 직업을 함으로써 행복하고 

즐거우면서 삶을 영위하는데 물질적으로 

도움을 주는 직업이야 말로 가장 좋은 

직업이 아닐까 생각이 되네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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