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knowledge & news

한국 최초 신문과 최초 신문광고 알아보기

by 40대 아재 2024. 2. 18.
반응형

불과 30~40년 전만 해도 대부분의 정보를 

신문을 통해서 접하던 시대가 있었는데요. 

여러 한문과 함께 세로로 읽는 당시의 

신문들은 작은 글씨 크기와 함께 읽기 자체가 

상당히 힘들던 신문이 나라안은 물론 

나라밖 소식까지 알 수 있는 가장 대중적이고, 

일반화된 정보매체 였습니다. 

오늘은 이제는 옛 명성과는 달리 인터넷과 

IT 기술발전으로 조금은 뒤로 물러나 있지만, 

한 시대를 풍미했던 신문에 대해 알아보고, 

'한국 최초 신문과 최초의 신문광고'는 

어떤 것이였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의 인터넷과 같았던 정보를 제공한 신문 모습

 

안녕하세요. 40대 중년아재입니다.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신문'은 영어로는 'newspaper'로 쓰이는 

사회에서 발생한 사실이나 그와 관련된 

내용을 해설해서 신속하게 널리 사람들에게 

전달하기 위한 정기 간행물이 신문인데요. 

신문의 내용에 따라 기관지나 전문지, 

그리고 기타 상업지 등으로 나누기도 합니다. 

보통 최소 월 2회 이상 발행하는 간행물을 

신문이라고 법에서도 정의를 하고 있죠. 

 

1980~90년은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버스나, 

기차, 그리고 지하철과 같은 곳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신문이었는데요.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손에는 

현재 스마트폰을 보고 있는 것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문을 보고 있었던 시절이였죠. 

사람들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언제나 어김없이 

보다가 놓고 간 신문들이 넘쳐났었고, 

그 신문들을 전문적으로 청소하거나 모아서 

생계를 유지하는 분들이 있을 정도로 신문은 

지금의 스마트폰에서 보는 각종 여러 정보를 

습득하고 보는 것과 같은 가장 일반적인 

정보를 알 수 있는 매개체 였습니다. 

 

신문에 있는 낱말 맞추기 퍼즐은 꽤나 인기있는 신문속 게임과 같았죠.

 

신문에 있는 퍼즐을 풀기 위해 볼펜을 꺼내서 

낱말 맞추기나 퍼즐을 풀기도 했었고, 

학생들은 학교에서 내준 숙제 중에서 신문의 

일정 부분을 스크랩을 해서 학교에 제출하거나, 

공부를 위해 사용하기도 했었죠. 

또한 신문은 좀 더 오래전으로 들어가보면, 

화장지가 귀했던 1970년~80년대 시골에서는 

재래식 화장실 한쪽에 모아논 신문을 잘라서 

철사고리에 여러장 걸어놓은 후 그것을 

화장지 대용으로 사용하던 시절이 있었죠. 

그럼 신문은 언제부터 어떻게 생겼을까요?

우선 신문에 대한 간단한 역사부터 하나씩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신문의 시작과 역사

 

세계적인 신문의 역사를 먼저 알아보면, 

기원전 131년 고대 로마에서 시작이 되는데요. 

이때 돌이나 금속에 글씨를 새겨서 로마 시민에게 

그 내용을 공표하던 공고문 '악타 디우르나' 또는 

'악타 퍼블리카','악타'로 불리는 지금의 신문과 

비슷한 매체를 인류의 신문 기원으로 보고 있죠. 

그리고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신문과 조금 더 

유사한 개념의 신문은 '십자군 전쟁'이 한창일 때 

당시 상인들이 장사를 위해 고용했던 사람들의 

편지를 서로 여러 사람이 돌려봤던 것에서 

고대 로마의 악타보다 조금 더 지금의 신문과 

비슷한 개념의 신문이 인류에게 생겼습니다. 

 

인류 최초의 신문 기원인 고대 로마의 악타 디우르나

 

필요할 때나 조금은 비정기적으로 발행하던 

신문의 개념에서 벗어나 정기적으로 발행된 

최초의 신문이 생겨나게 되는데요. 

'인류 최초의 정기적 발행 신문'은 16세기 후반인 

1580년 경에 독일 프랑크푸르트와 라이프치히 

지방에서 개최되었던 무역 박람회를 위해서 

최초로 연간 2회 발행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발행물이 최초의 정기 발행한

신문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 한국 신문의 시작과 역사

 

그럼 한국의 신문은 어떻게 시작이 되었고,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을까요?

우선 한국최초의 신문이라는 타이틀은 

총 4가지 종류의 신문으로 나뉘는데요. 

하나씩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한국 최초의 근대신문인 한성순보 모습

 

1. 한국 최초 근대신문-한성순보

 

'한성순보'는 조선말기였던 1883년 10월 31일 

고종 20년에 창설된 신문인데요. 

'한국인이 발행한 한국 최초의 근대적 신문'으로 

나라일에 대한 내용을 담은 '관보'입니다. 

우리가 잘아는 '민영복'과 '김만식'이 주재했죠. 

그런데 이듬해인 1884년 '갑신정변'으로 인해서 

당시 한성순보를 발행했던 기관인 '박문국'이 

화재로 인해 더 이상 그 역할을 할 수 없어서 

그해 12월에 한성순보는 발행이 중지됩니다. 

 

한국 최초의 주간신문이자 최초의 광고가 실린 한성주보

 

2. 한국 최초 주간신문-한성주보

 

'한성주보'는 한국 최초 근대신문인 한성순보가 

발행을 중지하게 되면서 그 맥을 계승한 신문으로 

이름을 순보에서 주보로 바꾸어 발행한 신문인데, 

한성주보도 한성순보와 같이 궁에서 일어나는 

소식을 담은 조보와 관보의 형식이었습니다. 

한성주보는 1886년 1월부터 1888년 6월까지 

정부가 주도한 기관지로서 '한국 최초 주간신문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신문입니다. 

 

한국 최초 민간신문인 독립신문과 서재필 박사, 최초의 한글신문과 영문판 신문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3. 한국 최초 민간신문-독립신문

 

'독립신문'은 '한국 최초 민간신문'이라는 대단한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거외에 또 다른 최초의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최초의 민간신문인데요. 

독립신문은 '최초로 한글을 사용한 신문'이면서, 

'최초로 영문판으로도 발행이 되었던 신문'이죠. 

최초 발행은 1896년 4월 7일에 되었습니다.

무려 3개의 최초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신문입니다. 

지금도 많은 분들이 독립신문을 한국 최초의 신문 

이라고 아시는 분이 많은 이유가 한글을 사용한 

최초의 신문이라는 점에서 가장 그렇게 많이 

알고 계시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현재 '신문의 날'이 독립신문이 창간일을 

따서 지정된 사실도 이런 이유입니다.

 

주시경 선생과 선생이 편집했던 협성회보

 

4. 한국 최초 일간신문-협성회보

 

'협성회보'는 1898년 11월에 최초 발행되어 

불과 6개월 정도 발행되었지만, 한국 최초의 

일간지로 기록되어 있는 신문인데요. 

'서재필'박사의 지도하에 설립된 '협성회'에서 

기관지로써 위대한 국문학자이자 언어학자인 

'주시경'선생이 편집을 한 신문이기도 합니다.

 

● 한국 신문에 실린 최초의 신문광고

 

신문이 정보를 얻고 나라 안밖의 소식과 함께 

사회적인 여러 사건사고와 갖가지 일들을 

알 수 있는 매체이기 때문에 신문에 광고를 

하게 되면 그 당시에는 최고의 광고효과를 

이룰 수 있는 것이 바로 신문이였죠. 

지금이야 온라인과 TV 등 너무나도 쉽게 

많이 접하고 있는 광고지만, 광고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고 무지했던 그 당시에 한국

최초로 한 신문에 광고가 실리게 되는데요. 

그 신문과 광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 한국 최초 광고가 실린 신문 

 

한국 최초의 주간신문이자 한성순보의 

뒤를 이어 발행된 '한성주보'가 한국 최초 

광고가 실린 신문인데요. 

1886년 2월 22일에 한성주보 제4호에 

최초의 신문광고가 게재가 되게 됩니다. 

 

최초의 신문광고가 실린 한성주보 4호 모습

 

▶ 한국 최초 신문광고 의뢰 업체

 

한성주보 제4호에 실린 한국 최초의 

신문광고의 제목은 한문으로 씌여졌는데요. 

'덕상세창양행고백'이라는 광고 제목으로 

최초로 한국 신문에 광고가 실린 것이죠. 

신문 제목 중 맨 마지막 두글자인 '고백'은 

당시 지금의 광고와 같은 의미로 씌었습니다. 

그리고 맨 앞 두글자인 '덕상'은 독일의 상사로 

독일 상사의 이름 뒤에 붙은 '세창양행'은 

그 독일 상사의 이름을 의미하는 것이었죠. 

다시 말해 독일 상사인 세창양행에서 하는 

광고라는 뜻을 가진 신문광고였던 것이죠.

 

덕상세창양행고백 광고가 실린 모습

 

덕상세창양행고백 이라는 제목의 신문광고를

한성주보에 실은 세창양행은 조선의 개항과 함께 

인천항에 들어온 외국 무역상사 중 하나였는데요. 

세창양행은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직원들을 위한 

일종의 사택을 짓게 됩니다. 

이 사택이 '한국에 서양인이 세운 최초의 양관'으로 

안타깝게도 6.25 한국전쟁으로 소실이 되었지만, 

사진으로는 남아 있습니다.

 

독일의 세창양행이 지은 한국 최초의 양관인 사택모습

 

세창양행은 의약품과 염료, 화학, 면도칼,

바늘, 양품과 보험과 해운업, 그리고

고리대금업까지 엄청나게 다양한 부분까지

영업력을 펼쳐서 당시 인천에서 

세창양행과 관련되지 않은 업종이 없을 정도로 

상당히 영향력이 컸던 회사였습니다.

그럼 이런 세창양행이 한성주보에 게재한 광고의 

내용은 어떤 내용이였을까요?

 

▶ 한국 최초 신문광고 내용

 

한성주보에 덕상세창양행고백이라는 제목으로 

한국 최초로 신문에 광고를 의뢰한 내용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었을까요?

우선 광고 내용 그대로 알아보면 다음과 같은데요. 

'저희 세창양행이 조선에서 개업을 했고, 

호랑이, 수달피, 검은 담비, 흰 담비, 소, 말, 여우,

개 등 각종 동물의 가죽과 사람의 머리카락,

소, 말, 돼지의 갈기털, 꼬리, 뿔, 발톱,

조개와 소라, 담배, 종이, 오배자, 옛날 동전 등

여러 가지 물건을 매입하고 있다. 

그리고 자명종 시계와 뮤직박스, 호박, 유리, 램프,

서양 단추, 서양 직물, 서양 천과 염색한 옷과 염료, 

서양 바늘과 실, 성냥등을 가지고 구색을 갖추어 

공정한 가격으로 이 물건들을 판매를 하니 

귀한 손님과 선비, 그리고 상인들은 자기들에게 

찾아와 주시길 바란다'라는 내용으로 광고를 냈죠. 

 

인천 재물포에서 실제 새한양행을 설립한  에드바르트 마이어 모습

 

한성주보에 신문광고를 내어 단순히 자신들이 

자신들이 조선에서 구하기 힘든 물건들을 파는 

상사가 아닌, 조선인들이 흔히 가지고 있거나,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을 매입도 한다고 해서 

당시 인천 제물포에서 굉장히 적극적인 방법으로 

영업과 장사를 했던 독일의 상사였습니다. 

 

세창양행의 신문광고는 처음 신문에 게재된 

제4호부터 약 6개월간 계속해서 올렸는데요

이듬해 독립신문에도 광고를 내는 등의 

당시 '외국국가 중 가장 많은 한글 광고를 실은 

외국 상사로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독일의 새한양행 사택이 그려진 엽서를 기준으로 복원한 오른쪽 사택 모습

 

오늘은 신문의 기원과 한국 최초의 신문들, 

그리고 그 신문에 실린 최초의 신문광고에 

대해서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는데요. 

어릴 적 부모님이 보시고 방에 있던 신문을 

위에서 아래방향으로 있는 것을 몰라서 

말이 안 되는 말로 중얼거리던 기억도 

어렴풋이 나기도 하는데요. 

물론 지금도 발행되는 신문과 함께 신문은 

국민들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고 여러 가지 

직접 보고 알 수 없는 소식들을 전해주는 

고맙고 많은 것을 알 수 있는 매체였죠. 

신문 이야기를 하니 신문에서 나는 

그 고유의 냄새가 그리워지네요.

 

-끝-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