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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nowledge & news

로버트 오펜하이머 이야기

by 40대 아재 2023. 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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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을 끝낸 것들 중 우리가 가장

많이 알고 있는 것은 원자폭탄이죠.

일본에 단 2개의 원자폭탄으로 일본의 항복을

받아낸 엄청난 무기입니다.

그럼 이런 무시무시한 원자폭탄을 개발한

인물은 도대체 누구일까요?

오늘은 그 인물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40대 중년아재입니다.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스스로를 후회하고

자신을 저주하는 말을 합니다.

'수천 개의 태양이 한 번에 폭발해 그 섬광이

전능한 하느님의 영광인 하늘로 날아간다면...

나는 죽음의 신이요, 세상의 파괴자다.'

이런 말을 남기며 자신이 만든 원자폭탄에

많은 회의를 느끼기도 한 과학자입니다.

 

원자폭탄의 아버지로 불리는 로버트 오펜하이머 사진

 

최근 개봉될 영화 제목이 '오펜하이머'라는

아주 유명한 감독이 만든 영화가 있습니다.

그건 어느 한 인물의 이름이기도 한데요.

풀네임은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입니다.

그는 1904년 미국의 부유한 유대인 가정에서

가족의 사랑을 받으며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양복지 안감의 수입상으로 제법

탄탄한 재정을 이룬 가장이었으며,

어머니는 화가였습니다.

 

학교를 다니는 기간 동안 그는 언제나 최고의

성적으로 졸업을 했으며, 1등을 놓치치 않고,

물리학과 화학, 문학 등에 많은 관심이 있었죠.

요즘말로 표현하자면 엄친아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부모는 걱정이 하나 있었습니다.

공부도 잘하고, 언제나 착하고 성실하던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운동신경이 없었고,

주위에 다른 친구들이 없었으며,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해서 언제나 외톨이인 시간이 많았습니다.

 

그는 세계의 명문이라는 하버드 대학 화학과를

최우등으로 졸업을 하는데요. 

졸업 후 3개월 후 영국의 명문대학인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물리학 연구소로 유학을 가게 됩니다.

화학을 전공한 그가 물리학을 공부하는 것에

적응을 하지 못한 오펜하이머는 영국 유학을

결국엔 포기하고 독일로 유학을 다시 갑니다.

그는 그곳에서 양자역학이라는 스펙트럼

양자론을 그곳에서 공부를 하게 되죠.

그는 스펙트럼의 양자론이라는 학위 논문외에

무려 16편의 논문을 쓸 정도로 이론 물리학자로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강의실에 있는 오펜하이머

 

그리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교수가 되는데요.

불과 25살의 나이로 버클리 분교에서 교편을 잡죠.

처음 교편을 잡았을 때에는 평판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보다 자신이 배운

이론 물리학에 대한 포교자가 되려 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의 강의 은 학생들이 받고 싶어 하는

인기폭발 강의가 되면서 수많은 학생들이 그의

강의를 받기 위해 신청을 하는 바람에 오히려

학생들을 퇴짜 놓는 일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강의 중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요.

그의 강의를 들었던 한 대학원생의 질문 하나에

그날 날이 새도록 답변을 한 일화가 있습니다.

그만큼 그는 이론물리학에 대한 열정과 가르침에

진심이었던 것이었지요.

그리고 유명한 명언을 하나 남깁니다.

'자신이 아는 것이 얼마나 적었는지를 모른 채

대학을 떠나서는 안된다.'

 

사이클로트론을 보고 있는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사어니스트 로렌스

 

오펜하이머는 자신이 학생들을 가르치던 곳들 중

버클리에서 그의 인생을 바꿀만한 인물을 만납니다.

입자가속기의 일종인 '사이클로트론'을 개발한

'어니스트 로렌스'를 만나면서 그의 인생이 상당히

많이 변화가 생기게 됩니다.

사실 2차 세계대전을 종료시킨 '맨해튼 계획'에

참여를 하게 한 것도 어니스트 로렌스입니다.

오펜하이머와 로렌스는 성격이나 사고방식이

많이 달랐지만, 완전 절친이었죠.

후에 버클리는 어니스트 로렌스의

사이클로트론으로 세계적인 물리학

연구센터로 발돋움하게 됩니다.

 

원자폭탄의 아버지 로버트 오펜하이머

 

그는 1943년 3월에서 1945년 10월까지 약 3년이

조금 안 되는 기간 동안 원자폭탄을 설계 및 제작한

'로스 앨러모스 연구소'의 소장으로 재직했습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맨해튼 계획이 성공을 하죠.

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인 1945년 7월에 미국의

뉴멕시코 사막에서 실시된 역사상 첫 핵실험

'트리니티 테스트'를 보고 난 그는

이런 말을 하게 됩니다.

'이 세상은 예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은 상상을 초월한 파괴력을 가진 핵무기가

견딜 수 없이 끔찍하다는 것을 의미한 것이었죠.

 

맨해튼 프로젝트로 제작된 원자폭탄 사진

 

그리고 그는 일본에 실제로 원자폭탄을 투하 후

당초 예상한 피해인원보다 훨씬 많은 사상자가

나온 것을 확인한 그는 이후 미국의 당시 대통령

트루먼을 만나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제 손에 피가 흐르는 것 같다'

자신이 설계와 개발을 주도한 핵무기의 위력에

양심의 가책을 호소한 것이었죠.

 

미국의 원자폭탄의 성공에 자극을 받은

당시의 소련이 1949년에 원자폭탄을 만들어

실험에 성공을 하게 됩니다.

이에 트르먼 대통령은 이번에는 수소폭탄을

만들라는 명령을 내리게 됩니다.

당시 오펜하이머는 원자력위원회 일반자문회의

의장으로 재직을 하고 있었는데요.

그는 수소폭탄 개발에 강력하게 반대를 합니다.

이로 인해 그는 당시 그가 가지고 있었던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그리고 1963년에 그를 복권시키죠.

 

아인슈타인과 이야기 중인 로버트 오펜하이머

 

오펜하이머는 또 다른 명언을 하나 더 남깁니다.

'과학이 결코 전부가 아니다. 그러나 과학은

아름다운 것이다.'

과학으로 인해 많은 생명과 많은 것들을 파괴하고,

없앨 수도 있지만, 과학으로 그것들을 막아내고

구할 수 있다는 양면적인 것을 이야기한 것이죠.

'원자폭탄의 아버지'라는 이름을 가진 오펜하이머는

세계 물리학계에 누구도 하지 못할 정도의 막강한

업적과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그리고 후두암에 걸려 1967년에 눈을 감게 됩니다.

 

말년의 로버트 오펜하이머

 

세계 물리학계에 엄청나게 큰 영향을 남기고,

천재과학자와 동시에 자신의 만든 핵무기를

원망하고 그 피해로 인해 엄청난 양심의 가책도

느끼며 살다 간 오펜하이머는 자신이 이룬

모든 사회적 지위나 명예를 포기하면서도

더 강한 무기를 만드는 것을 반대한 과학자입니다.

 

과학은 인류에게 많은 편리함과 선물을 줬지만,

동전의 양면처럼 인류를 파괴하고 없앨 수도 있는

양날의 칼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과학을 인류를 위해 올바르고 평화적으로

계속 발전시키고, 사용이 된다면 그 무엇보다

인류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이런 과학의 양면성을 

꾀뚫어 보고 있었던 위대한 과학자 였던 것이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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