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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영공을 최초로 비행한 파일럿

by 40대 아재 2023.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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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하늘을 최초로 비행한

파일럿(비행사)은 누구일까요?

지금도 아무나 파일럿이 될 수 없을 만큼

많은 노력과 공부가 필요한 파일럿입니다.

우리나라 영공(하늘)을 비행한 파일럿에 대해

포스팅하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40대 중년아재입니다.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안창남이 파일럿이 된 계기가 된 아서 로이 스미스와 그의 비행사진

 

우리나라 최초의 우리 영공을 비행한

파일럿은 바로 '안창남'입니다.

남녀 모두를 합해서 최초로 대한민국 영공을

비행한 파일럿입니다.

 

안창남은 1901년 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평동인

한성부 서서 반송방 지하계 평동에서 태어납니다.

그리고 입학이 조금은 늦은

11살에 미동보통학교에 입학을 하게 됩니다.

이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진학을 하였으나,

1915년에 중퇴를 하게 됩니다.

 

2년 후인 1917년에 우연히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우리나라에 한국을 방문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미국의 파일럿 중 한 명인

'아서 로이 스미스'라는 비행사가

지금의 용산에서 곡예비행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트 스미스'로 불리기도 합니다.

바로 이 비행기 곡예비행을 본 안창남은 

비행기와 비행에 대한 꿈을 가지게 됩니다.

 

아서 로이 스미스의 곡예비행기 커티스호/출처-국립항공박물관

 

안창남은 이후 결혼을 한 후에

일본으로 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오사카 자동차 학교'에서

약 2개월 동안에 운전을 배우고

'아카바네 비행기 제작소'에서 비행기의

제조법에 대해서 배우게 됩니다. 

비행기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찬

안창남은 이후 '오쿠리 비행학교'

진학을 해서 6개월간 비행기술을

이수하면서 1920년에 비행학교를 졸업을 합니다.

 

하지만 그때는 일본의 식민지 시절이었기 때문에 

민간 비행 자격에 대한 규정이 마련되기 전 시기라

그가 원하는 파일럿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다니던 비행학교에서 잠시마나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안창남의 비행학교 시절 사진

 

이듬해인 1921년 민간 비행기

자격규정이 만들어져서 1921년에

일본 최초 비행자격시험에 합격을 합니다.

드디어 그가 그토록 원하던

파일럿이 될 수 있었죠.

일본 최초의 민간 비행기 자격시험에서

수석으로 합격을 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해당 시험의 합격자는

단 2명뿐 이었다고 합니다.

다음 해인 1922년 도쿄-오사카 간 우편대회 비행에

참가도 해서 최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뛰어난 비행실력과

열정을 하지고 있던

안창남은 고국인 조선에서도

이름이 알려지게 되죠.

그 당시 '안창남의 비행기'라는

노래가 나올 정도로 굉장한 인기를

끌었다고 합니다.

 

금강호와 여의도 착륙으로 고국에서 비행한 안창남/출처-국립항공박물관

 

그는 1922년 겨울인 12월 5일에

비행기를 타고 고국에 돌아오게 됩니다.

이때 여의도 백사장에 착륙을 했다고 합니다.

이때 5만 명이 넘는 인구가 그를 보기 위해

모여들었다고 합니다.

당시 서울 인구가 30만 정도였다고 하는데,

서울인구의 6분의 1이 그를 보기 위해

여의도로 모인 것이죠.

 

그리고 5일 후인 12월 10일에는

'금강호'를 타고 조선의 하늘을

비행을 했습니다.

당시 금강호는 동아일보 주최로

한반도 모양을  그려 넣은 비행기였습니다.

고국의 엄청남 인기와 환영을 받은 안창남은

당시 일본의 식민지 시절

우울하고 희망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조선인들에게

희망을 보여준 아주 뜻깊은 일이었습니다.

그는 그해 일본을 다시 돌아가게 되지만,

일본에서 1923년에

관동대지진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 후 안창남은 조선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24년에 당시

여러 이유 등으로 중국에 망명을 한 후

'조선청년동맹'에 가입을 하고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뛰어들게 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독립운동가인 '여운형 선생'

소개로 산시성 군벌 옌시산의

군대 항공중장으로 근무하죠.

나중에는 국민당의 2차 북벌에 참가해서

장군계급인 소장계급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산시성에 있는

산시비행학교의 교장을 맡아서

그처럼 파일럿의 꿈을 가진 젊은이들의

양성에 노력을 하게 됩니다.

그는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대한독립공명단'이란 비밀 항일조직을

1928년에 결성하기도 합니다.

 

안창남과 그의 비행기

 

하지만 1930년 4월에 산시 비행학교에서 

비행교육을 하던 중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합니다.

그때 그의 나이 불과 31살이었습니다.

그의 시신은 산시성의 타이위안 시에 묻혔는데,

문화 대혁명으로 인해서 현재는 그 흔적을

안타깝게도 찾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최초로 우리나라 하늘을 비행한

파일럿이 최초의 파일럿이 아니냐라고 묻습니다.

안창남은 독립운동가 이면서 동시에 

우리나라 영공을 최초로 비행한 파일럿입니다.

 

당시 안창남의 사망소식이 실린 신문

 

그럼 우리나라 최초의 파일럿은 누구일까요?

나중에 별도로 포스팅을 하겠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파일럿은 '서왈보'입니다.

서왈보는 안창남 보다 2년 앞선 1919년에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노백린 장군'이 추진한

비행사 양성 사업을 미국에서 추진했죠.

그렇게 탄생한 서왈보와 이후 임시정부의

파일럿은 중국과 미국에서 비행을 합니다.

 

안창남이 탔던 금강호/출처-국립항공박물관

 

다시 정리하면 우리나라 최초의 파일럿은

'서왈보'가 공식적인 기록입니다.

그리고 '안창남'우리나라 영공을 최초로

비행한 파일럿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결혼을 했지만 후손이 없었던 사유로

독립운동에 힘쓴 공로로 받았던 훈장은 

현재 정부에서 보관 중입니다.

 

오늘은 암울한 시기 희망도 없었던

식민지 시절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비행기와 파일럿이라는 당시에는 굉장히

신기하고 되기가 어려운 것을 이뤄내고,

독립운동으로써 나라의 독립에 애쓰고,

비행학교에서 많은 인재들을 길러내는데 

앞선 안창남에 대해서 알아봤습니다.

 

최초로 우리나라 영공을 비행한 파일럿 전에

나라의 독립을 위해 애쓰고 힘쓴 그 마음이

더 앞선 기록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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