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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nowledge & news

을사오적과 오적암살단

by 40대 아재 2023.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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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일본이 조선이 지배하는 것이

합법적이라는 말도 안 되는 증거를 만든 것이

'을사조약'또는 '을사늑약'이라고 부릅니다.

대한제국 말기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해서

합법적으로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라는 것을

일제의 강요로 인해 조약을 한 것이죠.

오늘은 을사조약에 민족을 배신하고,

자신들의 사리사욕만을 위해서 나라를 배반한

5명의 민족 반역자로 불리는 '을사오적'과

을사오적을 민족의 이름으로 처단하고자 했던

'오적암살단'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40대 중년아재입니다.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1905년 을사조약은 고종이 강제 퇴위가 되기 

2년 전에 일어난 민족의 비극적인 사건입니다.

을사조약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904년에는

러일 전쟁 뒤에 우리나라와 맺은 조약인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합니다.

한일의정서는 많은 분들이 아시다시피

대한제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과 황실의 안전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일본이 필요하다는

말도 안되는 이유를 들어 자신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면서 한일의정서에 나와있는 내용에

위반되는 협약을 자신의 나라인 일본을 제외하고,

그 어떤 나라와도 체결할 수 없다는 어처구니없는

내용을 담아서 토지 약탈부터 시작한 사악한

오로지 일본의 강요로 체결된 협약입니다.

 

1905년 11월 9일 일본은 한국을 송두리째 

빼앗아 자신들의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특사를 한국에 보내 고종을 만납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말을 들으라고 한 나라의

왕에게 강요와 위협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6일이 지난 11월 15일에 다시 한번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달라는 강요를 하며

다시 한번 고종을 압박하게 됩니다.

수많은 관료들이 말도 안 되는 일본의 요구에

반대를 하면서 잠시 미뤄지다가 2일이 지난

11월 17일에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는 일본이

일본공사를 시켜서 당시 한국정부의 각부

대신들을 일본공사관에 불러서 자신들이 원하는

협약 승인을 강요하게 됩니다.

 

당시 주위에는 궁궐을 포함해 어느 곳이던

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인들이 있었으며,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엔 대신들이 전부 찬성을 하지 않아서

다시 궁중 어전회의를 열게 되었는데요.

사실 어전회의에서도 조선을 맘대로 차지하고,

식민지로서 인정하라는 협약에 찬성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조선의 왕인 고종과 아직은 나라를 위해

충언과 반대를 했던 충신들의 요구에 

처음에는 좋게 처리하려는 일본은 

방법을 바꿔서 협약을 처리하게 됩니다.

각부 대신들을 일본공관으로 불러서 한 명씩

대신들의 의견을 묻고 마침내 왕의 허락도 없이

일본에 강요로 찬성을 한 5명의

각부 대신들로 인해 1905년 11월 17일에

을사조약(을사늑약)이 체결되죠.

이때 일본에 찬성을 한 5명의 각부 대신들을

우리는 '을사오적'이라고 부릅니다.

을사오적은 대한민국 역사에 지울 수 없는

가장 친일적이고 사리사욕을 위해 나라도 팔아먹는

아주 못되고 천벌을 받아야 하는 인물로 여깁니다.

 

여기서 을사조약의 내용을

간단하게 알아보겠습니다.

 

을사조약 협약서 전문

 

제1조

일본국정부는 재동경 외무성을 경유하여 금후 

한국의 외국에 대한 관계 및 사무를 감리, 지휘하며,

일본국의 외교대표자 및 영사는 외국에 재류하는

한국의 신민 및 이익을 보호한다.

 

제2조

일본국정부는 한국과 타국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의 실행을 완수할 임무가 있으며,

한국정부는 금후 일본국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는 국제적 성질을 지닌 그 어떤

조약이나 약속도 하지 않기로 상약한다.

 

제3조

일본국정부는 그 대표자로 하여금 한국 황제폐하의

궐하의 1명의 통감을 두게 하여 , 통감은 오로지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기 위하여 경성(서울)에

주재하고, 한국 황제폐하를 친히

내알할 권리가 있다.

또한 한국의 각 개항장 및 일본국정부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지역에 이사관을 둘

권리를 가지며, 이사관은 통감의 지휘하에

종래의 재한국일본영사에게

속하던 일체의 직권을 집행하고, 아울러 본 협약의

조관을 완전히 실행하는 데 필요한 일체의

사무를 장리 한다.

 

제4조

일본국과 한국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 및 약속은

본 협약에 저촉되지 않는 한 모두 그 효력이

계속되는 것으로 한다.

 

제5조

일본국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의 유지한다.

 

이 5가지의 을사조약 내용으로 보면 누구나 쉽게

한국의 외교권을 일본이 다 가져갈 것이고,

한국에 있는 외교기관은 전부 없어진다.

그리고 자기들 허락 없이는 국제적인 일체의

행동등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설치하겠다는 통감의 우두머리가

조약체결의 원흉인 이토가 취임하죠.

통감은 훗날 우리 정부와 외교등 모든 면에서

직접 간섭과 명령을 통해 마음대로 하게 됩니다.

 

 

그럼 이렇게 고종을 비롯해 나라를 위해

일본의 험악하고 공포스러운 협박과 회유에도

많은 충신들은 일본에 반대를 했지만,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 나라를 팔아먹은

을사오적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을사조약에 찬성한 매국노 을사오적들

 

1905년 을사년에 체결된 을사조약에 찬성한

5명의 각부 대신들을 을사오적 또는 '오적'

으로 나라의 적으로 부릅니다.

역사가 기록하는 대표적인 친일파입니다.

한 명씩 간단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을사오적 중 한명인 외무대신 박제순

 

박제순 외무대신(외교부장관)

현재로 보면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에서

철종 9년이었던 1858년에 태어난

을사오적 중 한 명인 '박제순'입니다.

그는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고, 

대한제국의 외교를 담당하는 최고책임자인

외무대신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외교권 박탈의 사건인 을사조약시

마음대로 하라는 식의 나라의 운명과 

걱정은 하지 않은 무책임한 매국노죠.

을사조약이 있은 후 5년 후에 있었던

경술국치가 있었을 때에는 일본에 협조하고

일본의 도움으로 내무대신으로 있었는데,

경술국치에도 찬성을 한 파렴치한 사람이죠.

훗날 그의 친손자는 할아버지가 자결을 

하지 않은 것을 원망할 정도로 나라를 팔아먹은

대표적인 친일파 매국노입니다.

 

을사오적 중 한명인 이지용 내무대신

 

이지용 내무대신(행정안부장관)

'이지용'은 전주 이 씨로 왕족입니다.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의 형인

흥인군의 손자입니다.

그리고 서울 세곡동에 위치한 세종대왕의

다섯 번째 아들이었던 '광평대군'의 

17대 손인 왕족 출신 을사오적이죠.

왕족이라는 신분으로 일본에도 다녀왔고,

경상도와 황해도의 감찰사를 거쳐서

주일 공사를 지내게 됩니다.

그가 왕족임에도 나라를 팔아먹은

을사오적이 되는 과정은 정말 화가 납니다.

을사조약이 있기 1년 전인 1904년에는

당시 일본공사였던 하야시 곤스케로부터

1만 엔이라는 거금을 받고 한일의정서에

서명을 하고, 이듬해인 1905년에는

을사조약에 찬성해서 일본 정부로부터

1등 백작 작위까지 받게 됩니다.

그리고 한국을 식민지하고 말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고통을 준 조선총독부의 고문으로

활동을 하기도 합니다.

어처구니없는 것이 이지용은 나라를 팔아먹어

일본에게 받은 돈을 도박으로 날렸다고 합니다.

실제 있었던 일화로 그런 그가 어느 집에 가서

밥을 먹으려고 하니, 그 집에서 일하던 하녀가

친일파에게는 밥을 지어질 수 없다고 말하면서

실제로 요리하던 칼을 내동댕이 쳤다는 

사이다처럼 속이 뻥 뚫리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을사오적 중 한명인 군부대신 이근택

 

이근택  군부대신(국방부장관)

을사오적 중 군부대신이었던 이근택은

군인 출신으로 충주에서 태어난 또 다른

을사오적 중 한 명인 이지용처럼 왕족이죠.

실제 성종의 아홉 번째 아들인 경명군의

13대손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왕족이 나라를 팔아먹다니 정말 지금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근택이 나라의 권력을 얻게 되는 데 있어

유명한 일화가 하나 있는데요.

1882년에 있었던 임오군란 때 당시 왕비였던

명성황후가 충주로 피신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때 명성황후에게 싱싱한 생선을 바쳐서

눈에 띄게 되어 나중에 명성황후가 다시

궁궐로 돌아갈 때 벼슬길에 오르게 됩니다.

무과에 합격하고 훗날 병조참판을 지내지만,

이근택은 일찍부터 나라에 불만이 많았는지

대한제국 수립 당시인 1897년 정부의 전복을

꾀하게 되어 제주도로 유배도 가게 되죠.

하지만, 다시 복귀하여 법무대신과 군부대신을

역임하여 을사조약에 찬성을 한 을사오적이 됩니다.

 

그는 당시 국민들에게 엄청난 미움을 받았는데,

습격을 받거나, 살해위협을 받았기 때문에

호위군인이 항상 주위에 있었는데요.

그 호위를 일본군이 했었습니다.

을사조약과 경술국치 때 일본에 적극적으로

찬성을 하고 동조해서 일본 자작 직위를 받아

이지용처럼 조선식민의 컨트롤타워였던

조선총독부의 고문으로 활동도 합니다.

 

을사오적 중 한명인 권중현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농상공부대신

(농림축산식품+산업통상자원부 장관)

을사오적 중 한 명인 '권중현'은 철종 5년인

1854년 충청북도 영동에서 출생합니다.

을사오적 중 가장 오래 살았습니다.

무려 79세까지 당시 장수를 하죠.

권중현도 식민지의 대표적인 기관인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고문도 역임합니다.

을사오적 중 왕족 출신인 이지용과 이근택이

왕족의 신분임에도 나라를 팔아먹은 것과 같이

그의 조상도 한국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지금까지도

가장 존경받는 위인으로까지 알려져 있는

'권율 장군'과 '이순신 장군'의 피를 이어받은

자손이기 때문에 그의 매국노와 나라를 팔아먹은

그의 삶은 지금도 엄청나게 비난을 받고 있죠.

그의 아버지는 권율 장군의 10대손입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이순신 장군의 10대손이죠.

나라를 위해 가장 위대한 인물로 평가받는 

권율 장군과 이순신 장군의 후손에게 태어난

권중현은 공신 가문은 물론이고, 그의 아버지가

그가 벼슬을 할 수 있도록 애쓴 덕분에

관직을 남보다는 쉽게 시작을 할 수 있게 됩니다.

 

1896년 조선 및 대한제국 시대에 '서재필'박사가

창립한 '독립협회'소속으로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과 나중에 나올 대표적인 친일매국노인

'이완용'과 함께 초대 위원장 겸

독립협회 2대 회장도 역임합니다.

독립협회는 친일, 친미, 반러 성향이 모두 있죠.

독립협회는 긍정적인 부분이 교과내용에 있어서

많이 알려져 있지만, 부정적인 내용도 있습니다.

헌법이 정하는 범위 내에서 군주가 가진 군주권이

행사된다는 '입헌군주제'를 주장한 조직이죠.

 

그는 1904년 러일전쟁 후 한국을 방문한

'이토 히로부미'를 영접하는 영접위원으로

임명되고, 중국에 파견된 일본군을

위문하는 역할도 합니다.

을사조약 당시 농상공부대신으로 있었는데요.

대일본제국이 조선을 먹여 살려주고, 입혀준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다면서 나라를 위해 희생하고

위대한 업적을 남긴 조상을 둔 권중현은

말도 안 되는 어처구니없는 개인의 사리사욕을 위해

기꺼이 나라를 팔아먹는 것에 적극 찬성을 합니다.

이후 민족의 반역자로 찍혀 수많은 사람들에게

암살 및 습격을 받아 도망치면서 살았습니다.

권중현 또한 일본으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아서

매국노의 전형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훗날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날 때 같은 친일파였던

이재곤과 함께 자신의 작위를 일본에 반납하지만,

이것은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기가 아닌 목숨의 

위협과 습격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기 위해서

한 행동이죠. 더군다나 일본은 작위 반납을

승인하지도 않습니다.

 

친일파의 대표격인 을사오적의 이완용 노년사진

 

이완용  학부대신(교육부장관)

언제 이 이름이 나올까 기다렸을 정도로

한국에서는 그 이름만으로도 이가 갈리고,

친일파의 대표이며, 매국노의 대명사인

'이완용'입니다.

그는 지금으로 따지면 성남시 분당구

백현동인 당시 경기도 광주부에서 1858년

태어나게 됩니다.

전라북도 익산에 있는 낭산면 낭산리에

그의 묘가 있었지만, 그의 증손자가

파묘해서 유골을 화장했죠.

 

1904년 가장 친일스러운 친일파가 되어서

을사조약을 가장 적극적으로 체결하게 하고,

고종의 강제퇴위를 주도를 한 인물입니다.

또한 '정미 7 조약', '기유각서', '한일병합조약'등

능욕스러운 나라의 처참한 협약에서

하나도 빠지지 않는 유일한 친일파입니다.

그는 을사오적과 '정미칠적', '경술국적'에

모두 포함되는 유일한 매국노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의 창씨개명 이름은 '리노이에 칸요'입니다.

역사에 기록된 매국노의 아이콘입니다.

 

일사오적에는 포함이 되지 않았지만,

정미칠적에 포함되어 이완용의 사악한

민족배신의 행위와 버금가는 친일파인

'송병준'은 일본에 넘어가면서까지

나라를 팔아먹은 장본인인데요.

당시 나라를 잃은 모든 사람들에게

이가 갈릴 정도로 싫어했고 죽일 만큼

미워한 송병준보다 이완용은 그 급이 다릅니다.

이완용이 죽은 지 10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친일행위를 하는 사람을 이완용에서 성을 뺀 후

붙여 부르는 것을 보면 정말 그가 얼마나

뻔뻔하고 사악한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있죠.

 

이러한 민족의 배반과 매국노와 더불어

사악한 친일활동으로 훗날 나라에서 환수한

그의 재산에 억울하다면서 소송을 해서

일부 재산을 받아서 맞아 죽을 거 같았는지

외국으로 도망가서 잘 먹고 잘 사는 후손들의

모습을 보며 전 국민이 치가 떨리기도 했습니다.

그는 생전에 가장 친일스런 매국노 친일파임에도

일본어를 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그러면서 공교육에 일본어를 도입한 것이

바로 이완용이 한 것입니다.

 

일제강점기에 여러 곳에 있는 화장실에는

수없이 많은 이완용을 욕하는 낙서가 많았습니다.

차마 입으로 직접 할 수 없는 말들을 조금은

개인스럽고 차단된 공간인 화장실에서라도

그의 욕을 하지 않으면 분이 풀리지 않았던

당시 국민들의 심정을 알 수 있죠.

그리고 성균관대학교의 역대 총장의 이름에

이완용이 들어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요.

처음에 소개해 드렸던 을사오적 중 한 명인

박제순도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이로 인해 친일 대학교라는 오해가 있었는데요.

사실은 성균관대 '대사성'이라는 성균관을

총괄하는 직책이 있었는데요.

지금과 같은 의미인 총장과 같은 의미는 아니고,

관례적으로 붙여주는 직함이 맞다고 합니다.

실제로 고종 재위기간에만 대사성으로 이름을

올린 사람만 344명이라고 합니다.

단지 이름만으로도 성균관이 친일이 될 정도로

오해를 하는 일이 발생을 하죠.

오죽하면 당시 중국에 이완용이라는 이름은

나라를 팔아먹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죠.

실제로 한국에서는 개명을 하는 것이 그렇게

일반화되어 있거나, 개명을 법원에서 쉽게

해주는 경우가 불과 20년 전까지만 해도

없었는데요.

이완용이라는 이름은 그 시절에도 개명을

신청하면 개명 허가를 해줬다고 합니다.

실제로 1995년과 2010년에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이완용이라는

동명이인이 나와서 선거에 출마를 했는데요.

결과는 꼴등으로 낙선했습니다.

 

전라북도 부안군에는 그의 공적이 있는 

공덕비가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그 공덕비는 사실 이완용이 당시 전라북도

관찰사로 있었던 해 큰 해일을 막아서

큰 피해와 일부 땅을 만든 것을 기린 건데요.

이건 이완용이 나라를 팔아먹기 훨씬 전이라

그 공덕비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공덕비는 이완용의 악행을 안 후 

사람들로 인해서 훼손되어 반파가 되었죠.

 

이완용은 그의 재산과 유언이 유명한데요.

재산 중 일부를 일본에 기부를 하기도 했습니다.

죽을 때까지 친일파였던 것이죠.

이완용의 재산은 지금 돈으로 약 600억 원에

이를 정도로 어마어마한 재산이 있었습니다.

그게 땅과 여러 부동산으로 있었는데,

해방직전에 현금화를 했다고 합니다.

당시 보유하고 있었던 땅은 여의도의 8배로

나라에게 환수될 것을 예상한 이완용이

잔머리를 굴려서 그렇게 한 것이죠.

그는 당시 굉장히 귀했던 자동차도 있었는데요.

그의 아들인 이항구가 술에 취해서 자동차로

근처를 지나가던 어린아이의 다리가 부러지는

사고를 내게 되는데요.

역시나 사과나 보상은커녕 당연한 듯이

무시하고 갔다고 합니다.

 

이완용은 독립운동가였던 이재명(이수길)에게

명동성당에서 돌아오는 이완용을 단도로

습격했으나, 치료를 받아 살아나기도 합니다.

명동성당에는 이재명의사의 의거비가 있죠.

이완용은 이 사건으로 인해서 사건 당시

죽지는 않았으나, 훗날 이때 입은 상처로

폐렴과 천식 등으로 괴로워했으며, 

그의 직접적 사인인 폐렴으로 사망했죠.

 

을사오적을 없애기 위한 을사암살단/왼쪽부터 이기,나철,홍일주,오기호 의사

 

나라를 팔아먹고 민족을 배신한 을사오적을

우리 독립운동가와 백성들은 그들을 가만히

둘 수가 없었습니다.

개인의 사리사욕을 위해 나라를 팔아먹은

을사오적인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

이완용을 가만히 둘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국지사들이 을사조약이 있던 

1905년 이듬해인 1906년에 공동 설립자인

기산도, 김석항, 김일제, 나인영 등의 설립으로

이들을 민족의 이름으로 처단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설립된 단체 '오적암살단'이였습니다.

 

우리가 가끔 쓰는 말 중 하나가

'을씨년스럽다' 또는 '을사년스럽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을사조약은 당시 대한제국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억울하고 분통스러운

일본의 강요에 의한 처참한 일이었죠.

오적암살단의 설립자인 기산도는 1906년

을사오적 중 한 명인 이근택의 집에 잠입해

거사를 실행하기도 하고,

또 다른 을사오적 중 한 명인 권중현을 총으로

저격해 부상을 입히기도 합니다.

오적암살단은 '자신회'라는 조직에 있었는데요.

을사조약시 일본에 찬성한 일사오적 5명을

모두 처단할 계획을 수립하게 됩니다.

총인원은 200여 명으로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오적암살단은 을사오적중

권중현에게 가벼운 총상을 입히는 정도로

그리 주목할 만한 성과는 거두지 못했으나,

을사오적과 같이 친일을 행하는 다른 친일파와

매국노에게는 두려움의 존재가 되었습니다.

일본에 의해 색출되어 자신회의 오적암살단은

먼저 감옥에 있는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스스로 자수를 해서 총 30여 명이 체포됩니다.

이후 5~10년 정도의 유배형을 받게 되지만,

1907년 고종의 특별 사면으로 석방이 됩니다.

이때 활동했던 나철은 독립유공자이면서

훗날 '대종교'를 만들어 초대 교주가 됩니다.

그리고 대종교인 들은 독립운동에 상당히

많이 참여하여 만주까지 영역을 넓힙니다.

 

오늘은 나라를 팔아먹은 대표적인 매국노인

친일파의 대명사로 불리는 을사오적과

민족의 이름으로 나라를 배신하고 팔아먹은

을사오적에게 심판을 하려 했던 오적암살단

이야기를 했는데요.

우리 대한민국이 얼마나 많은 독립애국지사와

수많은 목숨과 희생으로 인해 지금의 우리가

편히 누리는 대한민국이 되었는지 절대로

잊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이 다시 듭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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