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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 한 통이 바꾼 역사

by 40대 아재 2023. 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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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역사가 전화 한 통으로 바뀐

엄청난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아시나요?

우리나라 최초의 전화기를 사용해서 

전화 한 통이 바꾼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40대 중년아재입니다.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우리나라에 설치된 최초의 전화는

1896년 덕수궁에 설치된 '덕률풍'입니다.

이름을 이렇게 지은 이유가 있는데요.

전화기를 영어로 텔레폰이라는 말을 듣고

최대한 한자로 옮긴 말이 바로 덕률풍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전화기 덕률풍

 

덕수궁에 설치되었다는 말에 사용자가

당시 왕이었던 '고종'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죠.

이때는 전화기를 들면 전류가 흘러서

교환대에 설치된 램프를 작동시켜서 교환원을

호출하는 방식으로 통화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럼 한국 최초의 전화기인 덕률풍이

역사를 바꾸게 되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최초의 전화기인 덕류 풍이 설치되기

1년 전으로 시간을 되돌려 봐야 합니다.

그 해는 을미년이었습니다.

을미년에 일어난 가장 비극적인 일을 꼽으라면

바로 당시 조선의 국모였던 '명성황후'가 시해된

바로 '을미사변'이 있었던 해입니다.

 

 

 

고종 32년인 1895년에 당시 일본공사로 있던

미우라 고로가 주동이 되어 명성황후가 있었던

경복궁 건청궁의 옥호루에 들이닥쳐서

잔인하게 살해한 극악무도한 일이 있었습니다.

 

경복궁 건청궁 내 옥호루 사진/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군인과 당시 건달들로 이루어진 일본의

명성황후 시해를 한 무리들은 나중에 재판에서

벌도 받지 않게 되는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당시 조선에 있는 일본인은 조선의 법에 따라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일본 측의 억지로

처벌을 받지도 않은 채 풀려나게 됩니다.

 

한 나라의 국모를 그것도 새벽에 몰래

군인과 건달을 시켜서 잔인하게 살해한

을미사변으로 고종을 비롯해서 온 나라

국민들은 반일감정에 극에 있었죠.

그중 황해도에서 살고 있었던  한 청년이

주막에서 국밥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일본인이 조선옷을 입은 채

허리춤에는 커다란 일본도를 가지고

밥을 먹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청년은 아무리 봐도 일본인이 조선에서

조선인으로 변장을 할 필요도 없고,

오히려 일본인임을 밝히고 다니는 판에

왜 일본인이 조선인 흉내를 내면서

다니는 것이 굉장히 이상하게 생각했죠.

 

이때 그 청년은 얼마 전에 있었던

을미사변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러면서 조선옷으로 변장한 일본인이

명성황후를 살해한 자객 중 한 명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청년은 일본인에게 물었습니다.

왜 칼까지 차고 다니면서 조선인 행세를

하고 다니는지 묻자마자 그 일본인은

들고 있던 칼을 빼들으며 그 청년을 위협했죠.

 

하지만 그 청년은 기백과 풍채가 대단했고,

일본인이 칼을 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치열한 싸움을 해서 그 일본인을 살해합니다.

나중에 확인된 그 조선인 행세를 한 일본인은

쓰치다라는 일본 군인의 장교였는데,

실제로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가담자였습니다.

그 청년은 일본인을 살해했다는 혐의를 받고

바로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감옥에 갇힌 그 청년은 재판결과 사형을 받고,

사형이 집행될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청년은 명성황후를 살해했을 수도

있는 그 조선인 행세를 한 일본인을 죽인 것에

조금의 부끄러움이나 후회가 없었습니다.

그 청년의 이름은 '김창수'였습니다.

이 이름만 들어도 아시는 분도 있으실 겁니다.

바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자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대명사이신 바로

'백범 김구'선생님입니다.

 

백범 김구 선생님/출처-국가보훈처

 

김구 선생님이 감옥이 갇힌 지 얼마 되지 않아

선생님이 갇혀 이었던 인천감옥에서

3개월이 지난 1986년 8월 26일이 됩니다.

이날 사형집행이 될 예정이었습니다.

그때 고종의 신하 중 한 명이 고종황제에게

황해도의 한 청년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인 중 한 명을 살해한 죄로 인천감옥에서

사형집행이 곧 있을 거라 말을 합니다.

 

이때 이 사실을 안 고종은 한국 최초의 전화인

덕률풍이 3일 전에 설치가 완료되었다는 것을

떠올리며 바로 그 전화기로 달려갑니다.

그리고 한국 최초의 전화기를 통해 최초의

장거리 통화를 하여 고종황제가 직접

이 사형을 중지시키게 됩니다.

당시 장거리 전화가 가능한 지역이 

지금의 서울인 경성과 인천 2곳만 가능했습니다.

만일 인천이 장거리 전화를 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면 바로 사형집행이 되었을 거라 합니다.

장거리 전화가 가능했던 단 2곳 경성과 인천.

김구 선생님은 그중 인천감옥에 갇혀 계셨죠.

정말이지 천운이 아니었나 생각을 합니다.

 

만일 최초의 전화가 김구 선생님의 사형이

집행된 후에 설치가 되었거나,

장거리 전화가 경성과 인천 단 2곳인 시점에서

다른 곳에 갇혔다면 우리나라 역사는 엄청나게

바뀌어 있을 꺼라 생각이 됩니다.

이 내용은 당시 조선의 공식문건으로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님의 '백범일지'에 쓰여 있죠.

 

일본인이 조선인의 옷을 입고,

그것을 의심하여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가담자를 살해한 것도 대단하고,

사형집행일 3일 전 설치가 완료가 된

한국 최초의 전화기인 덕률풍으로

한국 최초의 장거리 전화를 통해서

가장 먼저 설치된 덕수궁에서 당시

조선의 황제인 고종이 직접 전화를 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자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키워내고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엄청난 영향을 끼치신

백범 김구선생님을 극적으로 살린 

이 야기를 통해서 전화 한 통이 엄청난

역사를 바꾼 일이 아닐 수 없네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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