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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ly & memory

100원으로 깨진 형제애-어릴적 추억

by 40대 아재 2023. 1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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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는 먼 곳을 가기 위해서는

대부분 버스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자동차가 점점 늘어나는 시기였기는 했지만,

대중의 발 역할을 하는 버스가 가장 많이

사람들이 이용하는 교통편이었죠.

안내양 누나들이 엄청난 카리스마로

승객과 버스를 이끌던 시기입니다.

 

더 안타시면 오라이...저 어릴적 있었던 누님들이죠. 버스 안내양

 

1980년 초 중반쯤  여름방학을 맞아

시골 할머니 집으로 모인 사촌 동생들과

친형과 있었던 오래된 추억으로

오늘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40대 중년아재입니다.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커커억...컥컥...으으억"

"야! 삼켜 임마!. 아니면 뱉던지!"

"야 네가 등 두드려봐. 아니다 할머니!!"

 

형과 저, 그리고 사촌 남동생 2명과 함께

여름방학을 맞아 할머니집에 3일 간 맡겨져

그걸 빌미?로 할머니집에 데려다주신

아버지는 시장 통닭 2마리를 저희와 함께

할머니집에 얌전히 있는다는 조건으로

도착을 하자마자 형과 사촌동생들은

허겁지겁 통닭을 먹었습니다.

그중 사촌 동생 중 첫째가 평상시에도

목까지 음식이 차올라야 숟가락을 놓는 놈인데,

그날도 역시 닭뼈조차 젤리처럼 입에 넣어

씹어먹다가 닭뼈 하나가 목에 걸린 것이었습니다.

 

"할머니! OO이 닭 먹다가 목에 걸렸어요!"

"뭐? 어디 보자. 누가 걸렸다고?"

"OO이요. 큰 뼈가 걸린 거 같아요"

 

저는 급하게 마당 한편에 있는 우물 앞에서

음식 재료 준비를 하시는 할머니에게 달려가

사촌동생이 목에 뼈가 걸려서 컥컥거린다고

급하게 할머니에게 알렸습니다.

 

"어디 보자... 누가..."

"아 괜찮아요. 할머니. 그냥 다른 닭고기를

더 많이 넣어서 삼켰어요. 괜찮아요."

 

금방이라도 죽을 거 같던 목에 닭뼈가 걸린

그놈은 언제 그랬냐듯이 불과 10초도 안 되는

그 사이에 더 많은 통닭을 입에 밀어 넣어서

목에 걸린 닭뼈를 위장으로 밀어 넣은 것이었죠.

대단한 놈이었습니다.

 

"천천히 먹어. 뼈 잘 골라서 먹고..."

"네. 할머니"

 

할머니가 다시 별일 없다는 듯 우물로 가시고,

목에 닭뼈가 걸린 사촌동생 놈을 보니 왠지

죽빵을 날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형과 나 사촌동생 2명 해서 

총 4명의 초등학생들이 먹기에 통닭 2마리는

절대 부족한 양이 아니었지만, 이놈은 달랐습니다.

그사이 한 마리는 벌써 다 먹어치우고 있었고,

남은 다른 한 마리를 위해 손을 뻗고 있었죠.

그렇게 아버지가 사주신 통닭을 맛있게 먹고,

오래간만에 할머니댁 앞쪽 논에 있는 농수로로

물고기를 잡기 위해서 저희는 작년에 만들어놓은

대나무 손잡이에 양파 그물을 이어 만든

물고기를 잡기 위한 뜰채를 가지고 신나게

논 옆으로 길게 나있는 농수로로 향했습니다.

 

대나무로 만든 물고기 뜰채

 

형과 저 그리고 사촌동생들과 함께 물고기를

뜰채로 두 명은 잡고, 2명은 물고기를 몰아가며

더운 여름방학을 그렇게 신나게 놀았습니다.

당시 할머니댁 마당 한쪽에 있었던 우물은

한 여름에도 정말 차가울 정도로 시원했는데,

등목과 샤워를 거기서 하면서 더운 여름을

그렇게 하루하루 즐겁게 보냈습니다.

당시에는 할머니댁 부엌엔 가마솥 2개에 

아궁이에 불을 때서 밥을 하던 때였는데,

할머니에게 말씀을 드리면 당시 '깜밥'이라는

누룽지를 가마솥 크기만 하게 만들어서

설탕을 골고루 뿌려서 먹으면 그 어떤

간식보다도 맛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밤이 되면 모기장을 치지 않으면 잠을 잘 수가

없을 정도로 모기들이 덤볐기 때문에

할머니는 모기향을 피우고 모기장을 친 다음

그 안에서도 한참을 놀면서 잠이 들었습니다.

즐거운 시간은 어느덧 금방 지나가고,

3일이 지나고 4일째 점심쯤 되니 사촌동생들을

데리러 큰어머니가 오셨습니다.

당시 큰 어머니는 오토바이를 타고 오셨는데,

그 뒤로 바짝 2명의 사촌동생들을 태우시고,

할머니에게 뭔가를 주시고 오토바이에 탄

사촌동생들과 아쉬운 표정으로 다음을 기약하며

그렇게 인사를 했습니다.

 

저희는 버스를 타고 집에 가기로 했기 때문에

버스시간에 맞춰서 할머니댁을 나가야 했기 때문에

약간의 시간이 남아서 형과 '벽돌 치기'를 하면서

버스시간을 맞추려 했습니다.

 

"아싸~ 내가 또 이겼다. 빨리 줘. 빨리~"

"아 진짜... 한판 더해... 근데 너 돌 발에 올릴 때

잘 올려서 해 이렇게 하지 말고 저렇게 하라고!"

 

저와의 벽돌 치기 게임에서 계속 지기만 했던 형은

내기로 했던 당시 동그란 종이딱지를 걸고

게임을 하고 있었는데, 연속으로 계속 지니까

괜히 제게 트집을 잡으며 성질을 내고 있었습니다.

 

형은 저보다 게임을 못했던 것 뿐입니다.

 

이후 수차례 계속해서 하다가 게임을 바꿔서

동전으로 금에 가까운 사람이 이기는 일명

'금치기'로 바꾸자고 해도 역시 저에겐 안 됐습니다.

가지고 있던 종이딱지를 거의 다 저에게 잃었죠.

그러자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 나한테 버스비랑 가면서 과자 사 먹으라고

아버지가 200원 주신 거 알지?"

"어. 알아. 말 나온 김에 내 거 줘 100원..."

"싫어. 그냥 안 줄래..."

"뭐? 내 건데 왜 안주냐고! 줘! 줘!"

 

형은 게임에서 계속 지자 아버지께서 주신

집에 올 때 버스비가 당시 아이는 50원이었고,

나머지 50원은 할머니댁 버스를 타는 곳이

시골동네에 어쩌다 한 개씩 있는 가정집 같은

작은 슈퍼였는데, 항상 버스를 탈 때 그곳에서

과자 한 두 개를 사서 먹으면서 오곤 했습니다.

막걸리 같은 술도 파는 그런 동네 슈퍼였죠.

그런데 간식은커녕 집에 갈 때 사용하는 

버스비도 안 준다고 하니 저는 성질이 났습니다.

 

"빨리 달라고! 지가 게임에서 졌다고 아버지가

주신 버스비랑 과자살 돈 안 준다고?

너 아버지한테 다 이른다!"

"맘대로 해. 할머니한테 일러도 할머니는

형인 내편이니까 맘대로 해~"

 

당시 형의 표정이였습니다.

 

버스를 타고 집에 가지 못한다는 것보다는

당시에는 과자를 사 먹지 못한다는 것이

저에게는 굉장히 약이 올랐습니다.

하지만, 덩치도 키도 훨씬 더 큰 형에게

싸움을 통해 버스비가 과자살 돈을

뺏는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에 가까웠죠.

저는 바닥에 앉아서 계속 조르다가

나중에는 분에 못 이겨서 그냥 마당에

누워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오기가 생기더군요.

 

형을 혼내줄 방법이 생각났다...

 

마당에 누워서 한참을 그렇게 있다 보니

갑자기 형을 혼내줄 생각이 갑자기 났습니다.

당시 마음으로는 100원으로 형제관계를 

얼마든지 끊을 수 있다는 마음이었고,

저는 그 이상을 바랐습니다.

그리고 형에게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형. 한 번 더 기회를 줄게. 지금 안 주면

아마 후회하게 될 수 있어"

"됐어. 안 줘. 종이딱지 니 거까지 다 주면

한번 생각은 해보고.ㅎㅎㅎ"

 

형은 전혀 저에게 버스비 50원과 과자비

50원을 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저는 아무 말 없이 할머니가 계신 밭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밭일을 하고 계시는 할머니에게 집에 간다고

인사를 드리고 저는 그 길로 집에까지

걸어가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죠.

당시 할머니댁에서 저희 집까지는 버스로

40분 정도가 걸리는 상당히 먼 거리였는데요.

수없이 많이 왔던 할머니댁의 길은 그 누구보다

훤히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길을 잃어버릴

걱정은 사실 없었습니다.

 

"야! 너 어디가? 버스 아직 안 와! 좀 더 있어야 돼.

그리고 너 버스비도 없잖아!"

"..."

"너 집에까지 걸어가려고? ㅋㅋ 맘대로 해라.

니 거까지 다 과자 사 먹고 난 버스 타고 편하게

집에 갈 테니까 맘대로 해~ㅎㅎㅎ"

"..."

 

버스탈땐 금방 지나갔는데...끝이 안보이네...

 

사실 조금 걱정이 되었던 건 사실입니다.

초등학생 걸음걸이로 버스로 40분이 걸리는 거리는

결코 짧은 거리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나중에 집에 걸어왔다는 것을

부모님이 아시면 아마도 형은 부모님께 회초리를

맞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통쾌한 생각이 들어

힘차게 집을 향해 그렇게 한걸음 한걸음을 옮겼습니다.

여름이라 날씨는 굉장히 더웠지만, 중간중간

커다란 나무와 할머니댁에서 담아 온 시원한 

우물에서 뜬 물이 제 손에 있었기 때문에 

그걸 위안 삼아 그렇게 집으로 향했습니다.

 

걷다가 나이 드신 어르신을 보면 인사를 하였고,

또래 친구가 있으면 서로 왠지 모를 눈치를 보며,

서로의 모습을 천천히 살펴보면서 조금 긴장된

모습으로 서로를 쳐다보며 길을 걷기도 했습니다.

버스를 탈 때는 보지 못했던 길가의 풍경과 

낮은 기와집과 가끔 보이는 초가집 등 당시 

시골의 풍경도 제법 편안하게 보면서 집으로

가는 발걸음을 계속 옮겼습니다.

얼마나 걸었는지 다리가 아파서 버스를 탈때

중간에 멈추는 또 하나의 정류장이자 동네에

하나밖에 없는 다른 슈퍼 근처에 이르렀습니다.

부모님 차로 할머니댁에 올 때 가끔 들르던

이웃동네 슈퍼였는데요. 

슈퍼 앞 버스정류장에서 잠시 쉬고 있는

저를 보시던 슈퍼 할머니께서 제가 있는

정류장 돌의자 쪽으로 천천히 오시고 계셨습니다.

 

"너 이웃동네 OO네 손주 아니여?"

"네? 아... 네"

"왜 거기서 안 타고 여기에 있는 거야?"

"아. 그게 그냥 천천히 걸어가 보려고요.

다음 정류장에서 형 만나기로 했어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웃마을 슈퍼 할머니에게

형과 다음 정류장에서 만나기로 했다는

거짓말을 하고 저는 뭔가 또 물어보실까 봐

급하게 자리를 일어났습니다.

그때 할머니가 다시 저를 불렀습니다.

 

"야야... 이리 와봐."

"네? 왜요? 저 가야 하는데..."

"일루 와 봐 잠깐..."

 

할머니는 조금 막무가내로 슈퍼 안으로 저를

불러 들어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번에 너희 아버지가 우리가 키운 양파를

사간적이 있는데, 상태가 안 좋아서 싸게 

팔고 있었는데 제값 다 주고 사갔었어.

내가 고마워서 그러니까 과자하나 가져가.

너 먹고 싶은 거 아무거나 하나 고르고,

날 더우니까 환타 하나도 가져가라"

 

저는 놀랐지만, 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

종류는 그리 많지 않은 시골 슈퍼지만,

제일 크고 맛있어 보이는 과자 한 봉지와

병으로 된 환타 하나를 얻게 되었습니다.

감사인사를 드리고 저는 신나게 집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주신 과자를 바로 뜯어서

먹으면서 신작로라 부르는 먼지가 조금 나는

큰길을 작은 걸음으로 그렇게 계속 걸었습니다.

아버지는 평상시에도 가끔 그러셨습니다.

길가에서 야채를 파는 할머니나 노인분이

계시면 팔고 있는 거 다 해서 얼마냐고 

물어보시고 싹쓸이를 해오시는 경우가

전에도 종종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와 종종 필요한 만큼만 사 오지

왜 많이 사 왔냐고 다투시는 것도 종종 봤죠.

아무튼 그런 아버지 덕분에 가끔 들르던

시골 슈퍼에서 공짜로 과자와 음료수를

얻어서 왠지 횡재한 기분으로 기분 좋게

집으로 걸음을 계속 힘차게 옮겼습니다.

 

얼마나 걸었는지 주위가 점점 어두워지고,

가는 길에 슈퍼에 팔아서 껌이라도 바꿔서

먹으면서 가려했던 환타병도 무거워서

도중에 버리고 오는 길이였습니다.

주위는 완전 시골이었던 할머니댁을 벗어나

80년대 지방 도시모습을 한 주위의 풍경이

집에 그만큼 가까워졌다는 것을 의미했죠.

큰길에는 제법 많은 자동차와 버스들이 

꽤 시끄러운 소리를 내면서 다니고 있었고,

아버지 차를 타고 가거나, 버스를 탈 때

집에서 버스를 타고 10여분을 타고 오면

보이는 대학교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버스를 타고 10분 정도니까 조금만 더 가면

이제 집에 다 가겠구나'라고 생각하며

힘든 몸과 다리를 끌고 그렇게 높은 대학교

담벼락을 보면서 천천히 걸었습니다.

그렇게 한 시간가량을 더 걸으니 드디어

제가 다니는 당시 국민학교가 저 멀리서

그 모습을 보이고 있었고, 그 옆 성당과

바로 앞쪽에 있는 시장도 보였습니다.

그렇게 여름이지만 제법 어두워진 시간에

주변의 간판들이 제법 환하게 보이고,

익숙한 장소들이 제 눈에 보이자 비로소

조금씩 긴장이 풀렸는지 너무 힘이 들어서

다니는 학교 운동장 의자에서 잠깐 쉬려고

학교로 들어갔습니다.

철봉이 있던 모래사장 앞쪽에 의자가 몇 개

나란히 있었는데, 앉자마자 바로 누워서

하늘을 쳐다보니 별들이 보였습니다.

잠깐만 쉬려고 눈을 감았는데, 잠이 들었죠.

배가 고파서 깼는지 눈을 떠보니 주위가

완전히 어두워져서 빨리 집으로 가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몸을 일으켰습니다.

온몸이 다 아프고, 다리가 천근만근 느껴졌지만,

이제 걸어서 10분 정도면 도착하는 집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집으로 향했죠.

 

가는 길에 종종 가는 중국집 안에 있는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저녁 8시가 조금 넘은

시간을 볼 수 있었습니다.

보통 저녁을 7시 안에 먹는데, 집에 도착해서

저에게 버스비를 안 줘서 걸어오고 있을 상황으로

엄청나게 혼나고 있을 형을 생각하니 왠지

통쾌한 마음에 배고픔도 잠시 잊었습니다.

드디어 집 대문 앞에 이르자 기쁜 마음에

집으로 들어서는데...

이상하게 아무 인기척이 없었습니다.

 

"엄마~ 저 왔어요. 아버지~"

"...."

"형~ 나왔다고!"

 

아무도 대답도 안 하는 것이 이상해서 

부엌을 거쳐 안방으로 들어가 봐도 아무도

집안에 없었습니다. 이상했죠.

이 시간이면 저녁을 먹고 과일을 먹으면서

TV를 보거나 할 시간인데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형과 동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당시 휴대폰도 없었던 시기에 가족들이

어디에 갔는지 알아볼 수가 없었기 때문에

저는 우선 냉장고를 열어 먹을 것이 없는지

찾아보다가 반찬들이 있어서 밥통에서 

밥을 퍼서 반찬들과 함께 배가 터지도록

밥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러고 혼자 있는 집안이 너무 조용해서

거실에 있는 TV를 켜놓고 보고 있는데,

밖에서 웅성거리며 시끄러운 소리가 나더니

집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이어서

현관문이 열리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들어오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너... 언제 들어왔어?... 이놈의 자식...

엄마아빠가 할머니집까지 다녀왔잖아.

버스 오는 길로 다 찾아보면서 왔는데..."

"예? 저는.. 그냥... 형이.."

"이놈의 자식 아무리 그래도 거기가 어디라고

여기까지 걸어올 생각을 해!"

"너... 진짜 걸어왔냐..."

"오빠! 엄청 먼데 대단하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형과 여동생은

저에게 한 마디씩을 하면서 화가 나셨음에도

왠지 안도하는 표정으로 저에게 말씀하시고,

어머니는 제 등짝을 때리시며 부엌으로

저녁을 준비하시러 들어가셨고,

아버지는 방 안에서 회초리를 가지고 나오시며

밥을 먹고 이야기하자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형은 주눅 든 표정으로 있었고,

여동생은 내가 무슨 영웅이나 된 것처럼

눈을 반짝이며 동경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죠.

 

엄청 멀리 걸어온 작은오빠 멋져...하는 여동생 표정입니다.

 

저는 배가 고파서 밥을 먼저 먹었기 때문에

방에 들어가서 잠깐 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식사를 다 마치신 아버지가 저를

여동생을 통해 거실로 부르셨습니다.

 

"둘 다 여기 무릎 꿇고 앉아봐!"

"진짜 왜 걸어온 건지 말해봐"

"제랑 벽돌 치기랑 금치기 하다가 딱지를

잃었는데 화가 나서 버스비 안 줬습니다."

"너 형이 한 이야기 맞아?"

"네. 아버지. 맞는데요."

"형은 5대, 너는 2대. 바지 걷어"

"아니 아버지 저는 잘못이..."

"형이라는 놈이 동생 하나 못 살펴서

잘못했으면 잃어버릴 뻔했고,

아버지가 준 버스비를 안 주고

걸어오게 했으니 5대 맞고,

너는 아무리 형이 그래도 거기가 어디라고

여기까지 위험하게 걸어올 생각을 해?

부모 걱정하게 했으니까 2대. 알았어?"

"네..."

 

형과 저는 그렇게 아버지에게 회초리를 맞고

다시는 그렇지 않겠다고 말씀을 드린 후에야

방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 형과 같이 방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어색하고 불편한 상황에서 한 공간에

같이 있는 게 너무 싫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던 중 형이 제게 먼저 말을 했습니다.

 

"자 받아. 니 거다..."

"뭐? 됐어. 말 걸지 마. 꺼져"

"야 인마 그래도 형이 주는데 받아"

"됐어 싫다고 말 걸지 말라고!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형만 혼날 줄 알았는데...저도 회초리를 맞았습니다.

 

"100원 그럼 내가 갖는다. 다른 말하지 마"

"뭐? 100원? 그건 줘. 내 거니까"

"안 받는다며? 내가 갖지 뭐"

"아. 주라고! 내가 오늘 걸어온 걸로 치면

1000원은 걸어왔다고! 줘!"

 

그렇게 버스비와 과자비인 100원을 형에게

다시 받아낸 저는 그나마 회초리를 더 맞은

형과 함께 조금의 위안을 삼으며 100원으로

내일 친구들과 사 먹을 과자를 생각하며

조금은 뿌듯한 표정으로 누웠습니다.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제100원을 돌려준

형이 조금은 고맙기도 해서 이렇게 말했죠.

 

"내가 내일 과자 사면 조금 줄게"

"됐어. 안 먹어."

"왜? 내가 사줄게~"

"싫다고!"

"그래? 그럼 오늘 딴 딱지 줄게"

"..."

"왜 싫어?"

"알았어 그럼 아까 네가 딴 거 다 줘"

"반만 줄게"

"왜? 다 주라고"

"그럼 너 과자 내가 내일 사주면 좀 먹어.

그럼 내가 딱지 딴 거 다 줄게"

"알았어. 과자 뭐 살 건데?"

"뽀빠이랑...."

 

그렇게 형과 100원으로 영원히 안 볼듯한

형제간의 사이가 다시 좋아졌습니다.

40대 중반이 넘어 이제는 50대가 된

지금의 형이 어릴 적 가졌던 덩치도 크고,

힘도 세고, 내편이 되어줬던 어릴 적 형이

사는 곳도 멀리 떨어져 어쩌다 한번씩 보는

동네에 사는 이웃만도 못할 정도로 잘 못 보는

사이가 되긴 했지만, 이런 기억이 날 때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친형이고, 저 또한

형에게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인데

세상 살아가는 동안에 여러 가지 이유로

어릴 적과는 전혀 다른 방식과 사이로

살아간다는 것이 조금 안타깝고 아쉽기도 합니다.

 

여러분들도 형제나 자매사이에 어릴 적

즐거운 추억 하나쯤은 분명 있으실 겁니다.

꼭 명절이 아니더라도 버튼 몇 번 터치하면

반가운 목소리와 안부를 전할 수 있는 전화라도

가끔 해서 형제와 자매사이의 돈독한 사이를

계속 유지하면서 사는 것이 참 중요한 듯합니다.

이번기회에 형과 언니, 그리고 동생들과 함께

낮은 웃음이나 오래되었어도 잊히지 않는

추억이야기로 더욱 가까워지는 사이가

되는 계기를 만드는 것도 좋을 듯싶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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